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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머로이, 디즈니를 떠났다 돌아온 애니메이터의 연필

Penelope H. Fr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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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머로이
존 포머로이
Photo: Cpl. William B. Hill /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출생1951년 3월 26일
Los Angeles, California, United States
직업애니메이터

프라다의 새 홀리데이 캠페인에서는 쥐 몇 마리가 세이디 싱크의 신발을 물고 달아나고, 냉소적인 여우 한 마리가 눈밭에서 마야 호크를 뒤쫓는다. 이 동물들은 모두 존 포머로이(John Pomeroy)가 이끄는 팀이 연필과 종이로 그려냈다. 패션 매체들은 이 선택을 크리스마스 광고에 스며든 생성형 이미지에 대한 반격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포머로이에게 연필은 어떤 선언이 아니다. 한때 연필을 지키려고 디즈니를 떠났고, 훗날 다시 돌아가게 한 도구다.

그의 여정은 디즈니 가족의 이웃에서 시작됐다. 로스앤젤레스의 톨루카레이크에서 자란 그는 월트의 조카인 로이 디즈니와 이웃으로 지냈다. 소년 시절에는 공립도서관에서 예술가들이 The Art of Walt Disney와 피노키오, 밤비를 어떻게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는지 다룬 두툼한 책을 발견했고, 열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그는 거의 매주 스튜디오에 편지를 보냈다. 열다섯 살 때는 포트폴리오를 들고 버뱅크의 정문까지 찾아갔지만, 채용 중인 사람이 없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는 그곳에 서 있기만 했는데도 오히려 기운이 났다고 회상한다.

1951년 3월 26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포머로이는 패서디나의 아트센터 디자인 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1972년 두 번째로 디즈니의 문을 두드렸을 때는 ‘나인 올드 맨’ 중 한 명인 밀트 칼을 만났다. 칼은 그의 원근법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포머로이는 원근법 수업을 듣고 다시 찾아갔다. 1973년 1월 디즈니는 그를 연수 프로그램에 받아들였고, 에릭 라슨이 멘토가 됐다. 그는 배경화를 그리고 싶어 했지만, 자신이 그린 첫 연필 테스트가 모비올라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본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며 “그 일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수습 과정은 고됐다. 프랭크 토머스는 그의 첫 장면인 Winnie the Pooh and Tigger Too를 지도했다. 다시는 튀어 오를 수 없다는 말을 들은 티거가 걸어 나가는 장면이었는데, 토머스는 포머로이에게 이를 열여덟 번쯤 다시 그리게 했다. 이어 올리 존스턴은 생쥐 구조대 작업에 그를 참여시켜 고아 페니 캐릭터를 함께 발전시켰고, 포머로이의 표현을 빌리면 ‘연필을 든 배우’가 되는 법을 가르쳤다. 피터의 용에서는 또래 애니메이터인 돈 블루스, 게리 골드먼과 함께 작업했다. 주말마다 세 사람은 블루스의 차고에서 사운드트랙 녹음, 그림 촬영, 효과 촬영을 하며 영화 제작의 나머지 과정을 익혔다. 그 차고에서 단편 애니메이션 Banjo the Woodpile Cat이 탄생했다.

1979년 9월 13일, 블루스와 골드먼, 포머로이 그리고 동료 애니메이터들은 사표를 내고 돈 블루스 프로덕션을 세웠다. 이들이 맞서려 한 것은 옛 거장들이 쌓아 올린 장인정신을 깎아내리고 있다고 느낀 스튜디오였다. 이들은 그 거장들에게 배운 방식대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계획이었다. 포머로이가 프로듀서와 공동 각본가, 애니메이션 감독을 맡은 1982년작 마우스 킹은 그 계획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디자이너 릭 다이어와 함께 만든 레이저디스크 아케이드 게임 드래곤스 레어가 뒤를 이었지만, 시장이 무너지면서 회사는 파산했다.

회사는 사업가 모리스 설리번과 함께 설리번 블루스 스튜디오로 다시 일어섰다. 첫 장편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파트너로 참여했고, 더블린에는 대규모 애니메이션 시설을 마련했다. 포머로이는 애니메이션 총괄 감독이자 프로듀서로 피블의 모험에 참여했다. 이 작품은 1986년 디즈니가 그해 내놓은 쥐 이야기 위대한 명탐정 바실의 흥행 성적을 넘어섰으며, 당시 기준으로 개봉 당시 역대 최고 흥행 애니메이션 장편에 올랐다. 스필버그와 조지 루커스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공룡시대가 1988년 뒤를 이었다. 1989년 포머로이는 미국 지사를 이끌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돌아왔고, 이 지사는 찰리의 천국여행의 애니메이션 제작을 맡았다.

반란의 이야기는 대개 승리담으로 전해진다. 신예들이 디즈니를 떠나 흥행에서 디즈니를 이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머로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반란을 그리 미화하지 않는다. 이후 블루스의 작품인 에디의 환상 여행 등은 평단과 흥행 모두에서 고전했고, 포머로이는 문제의 원인을 스튜디오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는다. 그는 “우리는 창작의 틀에 갇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프로듀서 일이 그의 손에서 연필을 빼앗아 갔다. “예술가로서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계속 그림을 그리기 위해 디즈니를 떠났지만, 직접 세운 회사가 오히려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 1992년 그는 지분을 매각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디즈니 프로듀서이자 오랜 친구인 돈 한은 그를 다시 불러 포카혼타스의 존 스미스 캐릭터를 맡겼다. 포머로이가 디자인하고 애니메이션 작업을 함께한 캐릭터로, 작업에는 14명의 팀원이 참여했다. 환타지아 2000에서는 어린 시절 이웃이었던 로이 디즈니와 함께 일했다. 이어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에서 언어학자 주인공 마일로 태치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이끌었고, 보물성에도 참여했다. 디즈니가 2003년 손그림 장편 애니메이션 부서를 축소하자 그는 두 번째로 회사를 떠났다.

프리랜서로 보낸 수십 년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꾸준했다. 유니버설의 호기심 많은 조지에서 수석 애니메이터를 맡았고, 심슨 가족: 더 무비의 애니메이션 작업에도 참여했다. 워너 브라더스의 톰과 제리 영화와 디즈니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의 멋쟁이 낸시 클랜시에서도 일했다. 2018년 디즈니 하이페리온에서 출간된 도린 래퍼포트의 그림책 전기 Walt’s Imagination: The Life of Walt Disney에 삽화를 그리면서, 한때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그리기도 했다. 애니메이터들이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흉상을 조각하고, 역사적 장면을 그리며, 내슈빌의 립스콤 대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친다. 그는 1998년 기독교인이 됐으며, 자신의 작업을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2026년 10월 27일 공개된 프라다의 ‘Drawing Prada’ 캠페인은 글렌 러치퍼드가 촬영한 싱크, 호크, 천하오위, 켈빈 해리슨 주니어, 루터 포드의 사진에 포머로이 팀이 그린 동물들을 더했다. 실사 영상과 손그림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단편 영화들도 함께 선보였다.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WWD는 캠페인을 “AI 쓰레기에 맞선 프라다의 해독제”라고 표현했다.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포머로이는 기술이 아니라 장인정신의 관점에서 작업을 설명했다. “손그림 애니메이션을 해야 하는 데는 분명하고도 뚜렷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안에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죠.” 그는 이어 말했다. “저는 연필과 종이로 제 기술을 익혔습니다.”

이 한마디에 그의 경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밀트 칼에게 원근법을 배우라는 말을 듣고 돌려보내졌던 학생은 이제 고급 패션 하우스가 그림이 사람 손에서 나왔다는 증거를 원할 때 찾는 인물이 됐다. 포머로이는 그 방식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프라다 캠페인에서뿐 아니라 내슈빌의 강의실에서도 그 일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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