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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me Bettis, 고향 디트로이트 슈퍼볼 우승으로 은퇴한 스틸러스의 ‘더 버스’

Penelope H. Fr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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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me Bettis
Jerome Bettis
Photo: DHHS /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출생1972년 2월 16일
Detroit, Michigan, United States
직업전 NFL 러닝백
개인 수상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

피츠버그가 제롬 베티스의 마지막 시즌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은 거의 모든 걸 망칠 뻔한 순간이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플레이오프 경기 막바지, 3점 앞선 상황에 터치다운 라인까지 2야드를 남겨둔 스틸러스는 그해 한 번도 펌블을 하지 않은 러닝백에게 공을 건넸고, 콜츠의 라인배커가 공을 쳐내 떨어뜨렸다. 벤 로슬리스버거가 뒤로 물러나며 리턴을 저지했고 콜츠의 키커는 필드골을 놓쳤다. 베티스를 슈퍼볼이 열리는 디트로이트로 데려다줄 예정이었던 여정은 간신히 이어졌다.

그 별명 뒤에 숨은 선수 경력은 묘한 모양새다. ‘더 버스’는 긴 거리를 단번에 돌파하는 일이 드문 파워 러닝백이었고, 통계만 놓고 보면 누적 기록으로 분류되는 선수였으며, NFL 역사상 가장 감성적인 결말 가운데 하나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라인맨에 버금가는 체격으로 짧고 빠른 보폭을 내디뎠고, 선수 생활 대부분 동안 피츠버그가 그에게 맡긴 일은 미식축구에서 가장 화려하지 않은 역할이었다. 수비수들이 태클에 지칠 때까지, 몇 번이고 수비수들이 밀집한 곳으로 공을 들고 돌진하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은 디트로이트였다. 베티스는 1972년 2월 16일, 글래디스와 조니 베티스 사이에서 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고, 미식축구를 시작한 건 꽤 늦은 편이었다. 처음 빠져든 운동은 볼링이었다. 훗날 그의 삶을 바꿔놓은 미식축구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에야 시작했는데, 14세 때 천식 진단을 받은 무렵이었다. 진 워이치에초스키와 함께 쓴 2007년 회고록 The Bus: My Life In and Out of a Helmet에서 그는 마약을 팔던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고 털어놓았고, 부모와 고등학교 코치, 친구가 총에 맞는 모습을 목격한 충격이 자신을 그 길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밝혔다. 맥켄지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무렵,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는 그를 미시간주 최고의 선수로 꼽았다.

노터데임대 재학 당시 교내 신문 The Observer의 한 기자는 베티스가 수비수들을 태우고 달리는 버스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은 이를 구호로 바꿨다. “아무도 버스를 막을 수 없다.” 그는 2학년 때 학교 단일 시즌 터치다운 기록을 세웠고, 3학년을 마친 뒤 NFL에 진출했다. 30년이 지난 뒤에는 학생 신분으로 캠퍼스에 돌아와 2022년 5월 경영학 학위를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램스는 1993년 드래프트 전체 10순위로 그를 지명했고, 베티스는 데뷔 시즌부터 기대치를 새로 썼다. 러싱 1,429야드로 에밋 스미스에 이어 2위에 올랐고, 올프로 퍼스트팀에 선정됐으며 올해의 공격 신인상도 받았다. 팀이 두 시즌 모두 최하위에 그치는 동안 프로볼에도 두 차례 출전했다. 이후 구단은 세인트루이스로 연고지를 옮겼고, 새 감독 리치 브룩스는 패싱 위주 공격을 도입했다. 베티스의 러싱 기록은 1995년 637야드에 그쳤다. 브룩스는 풀백으로 전향할지 트레이드될지 선택하라고 했다. 베티스는 트레이드를 택했다.

1996년 드래프트 당일 램스는 3라운드 지명권과 함께 베티스를 피츠버그로 보내고, 대신 2라운드 지명권과 이듬해 4라운드 지명권을 받았다. 램스는 전체 1라운드 지명권으로 로런스 필립스를 선택했지만, 그는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리그에서 사라졌다. 이 트레이드는 NFL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거래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꼽힌다. 베티스는 피츠버그에서 맞은 첫 시즌에 러싱 1,431야드, 올프로 퍼스트팀 선정,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기록하며 답을 내놓았다. 이후 2001년까지 매년 1,000야드를 넘겼다. 빌 카워 감독은 그를 ‘클로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스틸러스가 경기 막판 앞서 있으면 베티스를 투입해 시간을 깎아내렸기 때문이다.

베티스를 향한 비판은 늘 산술에서 출발했다. 은퇴 당시 NFL 역대 5위인 러싱 13,662야드를 기록했지만, 그 기록을 얻기까지 공을 들고 뛴 횟수는 3,479회였고, 평균 전진 거리는 한 번에 3.9야드였다. 러닝백의 폭발력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이들에게 이 수치는 위대함보다 누적을 의미했다.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도 그를 기다리게 했다. 2011년 후보 자격을 얻은 뒤 2013년과 2014년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고배를 마셨고, 2015년에야 헌액됐다. 그를 옹호하는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었다. 평균 기록은 그가 공을 들고 뛴 상황, 즉 짧은 거리를 남긴 3다운이나 골라인 앞, 그리고 리드를 지키던 경기 마지막 4분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숫자가 흠집 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을 정확히 설명하는 기록이다. 1998년 추수감사절, 심판은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연장전 동전 던지기에서 베티스가 ‘앞면’을 골랐다고 판정했다. 디트로이트 라이언스는 피츠버그가 공을 만져보기도 전에 승리를 거뒀고, 리그는 동전 던지기 절차를 바꿨다. 하지만 음성을 보정해 들은 결과 베티스는 ‘앞면-뒷면’에 가까운 말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고, 그는 나중에 앞면이라고 말하려 했다고 인정했다.

이 논쟁이 피츠버그에서 자리 잡지 못한 이유는 마지막 장면에 있다. 2005년 1월 AFC 챔피언십 경기에서 패한 뒤 그는 은퇴를 생각했다. 로슬리스버거는 한 시즌만 더 뛰면 슈퍼볼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그 슈퍼볼은 마침 디트로이트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베티스는 2005년을 짧은 거리 돌파를 맡는 러닝백으로 보냈고, 정규 시즌 최종전에서 라이언스를 상대로 터치다운 3개를 기록해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다. 덴버에서 열리는 AFC 챔피언십 경기를 앞두고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나를 디트로이트에 데려다줘.” 2006년 2월 5일, 스틸러스는 슈퍼볼 XL에서 시애틀을 21–10으로 꺾었다. 단상에 올라 댄 루니와 빈스 롬바르디 트로피 옆에 선 베티스는 ‘버스’의 마지막 정류장이 바로 여기, 디트로이트라고 선언했다.

은퇴하자마자 거의 곧바로 방송인으로 변신한 그는 처음에는 NBC의 Football Night in America에서 스튜디오 분석가로 일했고, 이후 ESPN과 NFL Network에서도 활동했다. 피츠버그 노스사이드에 Jerome Bettis’ Grille 36을 열었고, The Office에서는 제지업계 컨벤션에서 사인을 해주는 자기 자신을 연기했다. 또 The Bus Stops Here Foundation을 통해 청소년 시절 진단받은 천식을 앓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매년 천식 및 스포츠 캠프를 후원하고 있다. 스틸러스는 36번을 공식 영구결번으로 지정한 적이 없지만, 베티스가 떠난 뒤 그 번호를 단 선수는 없다.

2026년 7월, 그는 The Action Network의 DJ 시디키와 인터뷰하면서 현재 선수단이 지난해보다 “10배는 더 낫다”고 평가했다. 또 마지막 시즌을 치르겠다고 발표한 애런 로저스의 결정이 팀에 “절박함을 품고” 뛰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티스는 트라메카와 결혼했으며, 두 사람에게는 제이다와 제롬 주니어, 두 자녀가 있다.

베티스 집안의 이름은 가을 토요일 경기장에서도 다시 들리고 있다. 제롬 베티스 주니어는 노터데임대 2학년 와이드 리시버다. 9월 라이스대를 52–0으로 꺾은 경기에서 리시빙 야드 팀 내 1위를 기록했고, 그중에는 56야드 캐치도 있었다. 그 활약에 따라 예상대로 ‘미니 버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버지는 경기장에서 가장 까다로운 2야드를 파고들며 명예의 전당에 오를 경력을 쌓았다. 아들은 ‘버스’가 거의 받아보지 못했던 긴 패스를 쫓아 자기만의 기록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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