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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케인, 발롱도르 수상… 잉글랜드 주장이 먼저 이겨야 했던 상대는 자기 자신의 마음이었다

Jack T. Tay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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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케인은 토트넘에서 축구를 배운 경기장에서 몇 마일 떨어진 런던 팔라디움 무대에 올라 발롱도르를 손에 들고, 의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세계 최고의 선수로 막 선정된 그는 자신조차 그 사실을 믿지 못했던 시절을 돌아봤다.

잉글랜드 대표팀 주장인 케인은 “사람들이 지금 몇몇 선수에게 기대하듯, 제가 슈퍼스타가 될 거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저는 때를 기다리며 열심히 해야 했죠. 많은 순간에 제 상대는 제 마음속의 저 자신이었고, 그걸 이겨내야 했습니다.” 케인은 킬리안 음바페와 라민 야말을 제치고 수상했으며, 마이클 오언 이후 발롱도르를 받은 첫 잉글랜드 선수다.

런던에서 열린 시상식, 인내하며 기다린 선수에게 돌아간 영예

제70회 발롱도르 시상식은 프랑스 밖에서 열린 첫 행사로, 1956년 초대 수상자인 스탠리 매튜스를 기리기 위해 런던에서 개최됐다. 케인은 매튜스, 바비 찰턴, 케빈 키건, 오언에 이어 잉글랜드의 다섯 번째 수상자가 됐다. 키건은 75세였던 7월 세상을 떠났다. 시상식에 앞서 오언은 영국 방송에 자신이 살아 있는 유일한 잉글랜드 수상자라고 말했다. 그날 밤이 끝날 무렵, 그는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33세인 케인은 남자 부문에서 처음으로 수상한 선수 가운데 최고령에 가까운 편이다. 1981년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이후 바이에른 뮌헨 선수로는 처음 상을 받았으며, 구단 최고경영자 얀크리스티안 드레센이 짚었듯 독일 구단 소속 선수로도 30년 만의 수상이다. 이것이 그날 밤의 기록이다. 케인의 수상 소감은 그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지를 들려줬다.

네 차례 임대와 10년간의 아쉬움이 무대 위의 케인을 만들었다

아스널 유소년 아카데미는 어린 시절의 케인을 내보냈고, 토트넘은 그가 11살 때 받아들였다. 케인은 무대에서 토트넘을 향해 “제가 꿈을 이루게 해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토트넘은 그를 거듭 다른 곳으로 보냈다. 레이턴 오리엔트, 밀월, 노리치, 레스터로 임대를 떠났다. 구단은 미래를 책임질 선수라고 확신하는 이를 네 차례나 임대 보내지 않는다. 확신이 서지 않는 선수에게 그렇게 한다.

케인은 스스로 의심의 여지를 없앴다. 토트넘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가 됐고, 이어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최다 득점자가 됐지만 우승 메달은 좀처럼 따라오지 않았다. 리버풀에 패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이탈리아와 승부차기 끝에, 스페인에 각각 패한 두 차례의 유럽선수권 결승전. 카타르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의 대회 운명이 걸린 순간, 프랑스를 상대로 찬 페널티킥은 크로스바 위로 날아갔다. 바이에른으로 이적할 때까지 케인은 동세대 선수 대부분보다 많은 골을 넣었지만 우승은 하나도 없었다. 독일에서 맞은 두 번째 시즌에 처음으로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혼자 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케인이 말한 상대가 누구인지 안다. 다리는 제 몫을 한다. 서브는 코트 안에 들어가고, 달리기는 타이밍을 맞추며, 마무리는 천 번이고 연습해둔 대로 나온다. 하지만 승부는 시선 뒤편, 선수가 자신이 이 자리에 어울리는지 의심하기 시작하는 찰나에 무너진다. 케인은 “그 모든 순간, 오르막과 내리막이 없었다면 오늘 이 순간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힘든 시절이 별것 아니었다고 가장하지 않았다.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도 원했던 두 대회 우승은 놓쳤다

케인의 수상 근거는 압도적인 득점 기록이었다. 지난 시즌 바이에른에서 51경기에 출전해 61골을 넣었다. 분데스리가에서 36골을 터뜨려 3년 연속 득점왕에 올랐고, 독일컵에서 10골, 챔피언스리그에서 14골을 기록했다. 유러피언 골든슈를 두 번째로 수상했다. 바이에른은 리그와 슈퍼컵, 독일컵에서 우승했고, 독일컵은 케인 커리어 첫 국내 대회 우승이었다. 잉글랜드 대표팀 기록까지 더하면 65경기 73골이다. 이는 21세기 들어 선수 한 명이 기록한 두 번째로 많은 득점으로, 69경기에서 82골을 넣은 리오넬 메시만이 케인보다 앞선다.

그런데도 케인이 가장 원했던 두 대회에서는 다시 한번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바이에른은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잉글랜드는 월드컵 4강에 올라 앤서니 고든의 골로 아르헨티나를 앞서갔지만, 엔소 페르난데스의 동점 골과 추가 시간에 터진 라우타로 마르티네스의 결승 골에 무릎을 꿇었다. 대회에서 6골을 넣은 케인은 그날 아르헨티나 페널티 지역에서 공을 한 번도 터치하지 못했다. 잉글랜드는 3·4위전에서 프랑스를 꺾어 1966년 이후 최고 성적을 거뒀다. 주장이 짊어질 위안거리이지, 마음껏 자축할 성과는 아니었다.

케인은 무엇이 부족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봉투를 열기 전 DAZN과 인터뷰하며 “분명 제 최고의 시즌이었습니다”라고 말한 뒤, 빠진 것들을 짚었다. 그는 “그 대회들에서 우승했다면 수상이 확실했겠죠. 하지만 축구가 그런 거니까요”라고 덧붙였다. 한 번에 두 가지 사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경쟁자의 말이었다. 이번 시즌은 자신의 생애 최고였지만, 마지막에는 여전히 침묵으로 가득한 라커룸에 남겨졌다는 사실 말이다.

공격수들이 하락세에 접어들 나이에도 케인은 계속 성장했다

그에게 이 상을 안겨준 자질은 끈질기고 화려하지 않은 성장이다. 대부분의 중앙 공격수는 20대 후반에 전성기를 맞고, 30대에는 기량 저하를 관리하며 뛴다. 케인은 서른 살에 새로운 나라로 건너가 낯선 리그와 전술 체계를 익혔고, 오히려 더 나아졌다. 케인은 바이에른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직접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과 함께한 뒤로 선수로서도, 한 사람으로서도, 리더로서도 성장했습니다.”

케인은 매주 훈련에서 맞붙은 다요 우파메카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저와 우파의 대결”이라고 표현했다. 또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참석하지 못한 감독 뱅상 콩파니에게는 메시지를 보냈다. “비니, 아직 병원에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이 상이 조금이나마 기운을 북돋아주면 좋겠습니다.” 부모에게도 감사했다. “축구선수가 되라고 압박한 적이 없었어요. 그저 제가 최선을 다하고 늘 배우기를 바라셨죠.” 이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뛰어왔는지 보여주는 말을 남겼다. “제가 무엇을 이루든, 골을 몇 개 넣든, 발롱도르를 받든, 중요한 건 늘 더 나아지는 겁니다.”

바이에른의 스포츠 부문 책임자인 막스 에베를은 가장 간명한 말로 의미를 짚었다. 케인이 “오늘 이곳, 고향에서 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누구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멋진 메시지를 모두에게 전한다”고 했다.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토마스 투헬은 오래전에 이미 “더는 극찬할 표현이 바닥났다”고 말했다.

이 상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끝내주지는 않는다…케인도 바라지 않는다

케인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미 이런 순간을 겪은 적이 있다. 한 달 전 웸블리에서 잉글랜드가 세계 챔피언을 상대로 한 골 앞서던 경기, 페널티킥을 차려던 순간 디딤발이 미끄러졌다. 공은 크로스바를 맞았고 스페인이 역전승을 거뒀다. 케인은 그 일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믿으며 다음 기회를 원한다고 말했다. 실축한 뒤에도 그렇게 말하는 공격수는 팔라디움 무대에서 자신의 가장 큰 상대가 자기 마음속에 있었다고 인정한 바로 그 선수다.

발롱도르가 케인의 경력에 남은 빈칸을 채워주지는 않는다. 여전히 챔피언스리그 우승 메달도, 국가대표팀 트로피도 없다. 케인은 그 사실을 알고 이번 주 바이에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날 밤 확인된 것은 그 빈칸이 그가 계속 노력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는 점이다. 네 구단에 임대됐다가 돌려보내진 소년은 이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됐다. 한때 자신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던 목소리에도, 여전히 답이 기다리고 있다. 다음 훈련, 다음 기회, 다음 페널티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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