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극장 개봉 ‘언더톤’, 화면에 단 두 사람만 등장하는 A24 호러의 진짜 정체

Penelope H. Fritz

한 여자가 옛 방에 앉아 헤드폰을 귀에 바짝 누른 채,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들은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복도 끝, 두 번째 문 뒤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 두 소리는 같은 얇은 벽을 통해 그에게 닿는다. 94분 동안 ‘언더톤’(undertone)은 둘 중 어느 쪽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그에게도, 관객에게도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이언 투아손의 장편 데뷔작은 팟캐스트 스릴러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에비 바빅은 친구 저스틴과 함께 괴담 방송을 진행한다. 둘 중 회의론자는 에비다. 청취자가 보내온 모든 소음과 속삭임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내는 쪽이다. 그러던 그가 어머니를 돌보러 집으로 돌아오고, 새 녹음이 도착한다. 도시 어딘가의 한 부부가 밤마다 집 안을 떠도는 소리를 녹음해 보낸 것이다. 에비는 늘 그랬듯 속임수를 찾아 듣는다. 이번에는 그 속임수가 그를 마주 본다.

한 벽의 두 얼굴

이 영화를 단단히 붙드는 건 투아손이 세우고 단 한 번도 깨지 않는 규칙 하나다. 러닝타임 내내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단 둘, 에비와 그의 어머니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공동 진행자는 목소리다. 괴이를 겪는 부부는 들릴 뿐 보이지 않는다. 의사는 전화선이다. 다른 집에 깃든 그것도 들릴 뿐 보이지 않는다. 에비의 청취자들조차 서로 부딪치는 목소리의 벽으로 도착한다. 관객은 정확히 에비의 자리로 떠밀린다. 화면이 대신 일해주지 않으므로, 숨소리와 잡음만으로 괴물을 직접 조립하며 스피커 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된다.

여기서 설정은 장치이기를 멈춘다. 투아손은 360도 몰입형 음향 호러에서 장편으로 건너왔고, 장르 감독들이 알면서도 좀처럼 믿지 못하는 사실 위에 영화를 세운다. 출처를 짚을 수 없는 소리가 마주 볼 수 있는 얼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이다. 화면 속 얼굴은 한정되어 있다. 보고, 가늠하고, 적응한다. 그러나 근원 없는 소리는 계속 부풀고, 머릿속이 거기에 몸을 붙인다. 그 몸은 언제나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형상이다. 열렸는지 아닌지 모를 문. 알아들었다고 믿은 목소리 아래에서 숨 쉬는 또 한 겹의 결. 카메라는 에비에게 바짝 붙어 있고, 가장 끔찍한 일은 늘 화면 가장자리에서 벌어진다.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의 신경이 늘 머무는 바로 그 자리다. 절반은 눈앞의 일에, 절반은 복도 끝 방에, 숨소리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또 하나의 들림

‘언더톤’의 두 번째 들림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비는 어머니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러 집으로 돌아왔고, 자라난 집은 그가 잠 못 든 채 소리를 분별하는 장소가 되었다. 저건 바람인가. 저건 보일러인가. 저건 몇 주째 두려워해온 마지막 숨인가. 저주받은 녹음과 죽어가는 어머니는 나란히 흐르는 두 줄기가 아니다. 두 얼굴을 받아 든 하나의 공포다. 영화는 멈출 수도, 놓칠 수도 없는 소리를 기다리며 밤을 보내는 일이 무엇을 앗아가는지 거듭 묻는다.

에비의 회의는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이 영화의 동력이다. 그는 녹음에 설명이 있다고 우기고, 영화는 그가 옳으면서 동시에 겁에 질리도록 둔다. 설명이 무서운 소리를 무섭지 않게 만든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새벽 3시에 보일러가 무슨 소리를 내는지 안다고 해서, 어둠 속에서 그 소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덜 두려웠던 적은 없다. 영화는 그 점을 존중한다. 의심한다고 그를 벌하지 않고, 믿는다고 보상하지 않는다. 그저 계속 듣게 둘 뿐이다. 그가 멈출 수 없는 단 한 가지다.

그의 집

투아손은 이 영화가 어디서 왔는지 숨기지 않는다. 그는 ‘언더톤’을 토론토 노동계급 동네에 있는 자신의 실제 어린 시절 집에서 찍었다. 몇 달 간격으로 시한부 진단을 받은 부모 두 사람을 그가 직접 돌본 바로 그 집이다. 영화 속 벽은 그의 벽이다. 에비가 눈을 떼지 못하는 복도는 그가 지켜본 복도다. 이 내력은 보도자료의 토막 정보처럼 영화 위에 얹혀 있지 않다. 모든 장면 아래에서 누르는 압력이며, 괴이가 바깥에서 닥치는 위협이라기보다 집이 흡수해 조용히 되감아 트는 무언가로 읽히는 이유다. 누군가 죽은 집은 그 죽음의 소리를 품는다. 그런 집에 앉아본 사람은 안다. 재생 버튼을 누르든 말든, 방은 그 녹음을 간직한다.

영화의 인내도 여기서 비롯된다. 호러는 보통 폭로를 향해 달려가지만 ‘언더톤’은 거부한다. 에비가 이미 다가올 줄 아는 결말, 돌봄을 해본 누구나 다가올 줄 아는 그 결말을 향해 가면서, 긴장을 놀라움이 아니라 기다림에 쓴다. 공포의 순간은 분명 있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핵심은 그 사이의 긴 무(無)다. 아무도 녹음하지 않는 돌봄의 시간, 날짜별로 세어둔 약, 갈아 끼우는 시트, 무엇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심장을 멈추게 하는 옆방의 소리로 깨지는 침묵의 시간이다.

10년 동안 들어온 자세

팟캐스트라는 틀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가장 큰 목소리로 나온 비교들이 놓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어떤 평자는 A24 비탄 호러의 기준점 ‘유전’을 끌어왔고, 어떤 평자는 소리 자체를 전염병으로 만든 캐나다 영화 ‘폰티풀’을 떠올렸다. 둘 다 표면을 가리킨다. ‘언더톤’이 실제로 하는 일은 대중의 습관을 그 습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10년 동안 낯선 이의 목소리로 남의 죽음을 듣다 잠드는 법을 익혔다. 비탄을 어둠 속에서 헤드폰으로 소비하는 무언가로 다뤄온 것이다. 영화는 관객이 지금 취하고 있을 바로 그 자세를 그대로 가져와, 녹음이 남의 비극이기를 멈추고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묻는다. 떠날 수 없는 집에서, 자신이 고르지 않은 일정으로 끝없이 반복되는 그 소리를.

돌봄은 이미 일종의 들음이라고 영화는 안다. 타인의 숨을 끊임없이 낮은 강도로 감시하는 일이며,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민망함을 느낄 새도 없이 모든 삐걱임에서 파국을 먼저 듣도록 길들여진다. ‘언더톤’은 그 들음에 호러의 형태를 입히고, 94분 동안 관객이 그것을 밤마다 매일 밤 행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한다. 어느 소리가 자신이 각오해온 그 소리인지 끝내 알지 못한 채로.

이것이 영화가 열어두고 닫지 않는 질문이다. 괴이는 견뎌낼 수 있다. 문턱에 소금을 뿌리고, 테이프를 태우고, 집을 떠나도, 최악은 걸어 나온 그 건물에 남는다. 다른 하나는 두고 떠날 수 없다. 마침내 녹음이 멎고 복도 끝 두 번째 문이 잠잠해질 때, ‘언더톤’은 묻는다. 살아남음이 아직 헤드폰을 쥔 사람에게 무엇을 되돌려주는지,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소리는 들리는 소리인지 들리지 않는 소리인지를.

이언 투아손이 연출하고 A24가 배급한 ‘언더톤’은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이며, 러닝타임은 94분이다.

출연진

토론

댓글 0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