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배하는 여자》, 권력의 얼굴을 차갑게 해부하지만 스릴러의 조임은 느슨하다

프란 토레스 감독의 장편 데뷔작(2022). 패션계 거물과 젊은 이민자 사이의 위험한 거래.
Martha O'Hara
Google에서 추가하기

패션 업계에서 막 자리를 잡아 가던 젊은 여성이 임신 때문에 커리어가 끝났다고 믿는다. 그때 우상이던 상사가 그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선다. 프란 토레스 감독의 장편 데뷔작 〈지배하는 여자〉는 이 제안을 처음에는 구원처럼 내밀지만, 곧 빠져나갈 수 없는 계약으로 바꿔 놓는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스페인 드라마이고, 중심에는 아이타나 산체스-히혼과 쿠멜렌 산즈가 있다.

소피아(쿠멜렌 산즈)는 아르헨티나에서 마드리드로 온 이민자로, 연인 나초(알렉스 파스트라나)와 함께 산다. 나초는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만 소피아는 그렇지 않고, 임신 사실마저 그에게 숨긴다. 낙태를 생각해 보지만 신부의 만류에 마음을 접는다. 동경하던 디자이너 베아트리스(아이타나 산체스-히혼) 밑에서 일하게 되자 금세 눈에 띄는 존재가 되는데, 베아트리스 앞에서 무너지듯 임신을 털어놓는 순간 상황이 뒤집힌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베아트리스는 거액의 보상을 내걸고 아이를 자기에게 넘기라고 제안한다. 조건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외딴 시골 저택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다. 소피아가 이를 받아들이고 나초를 아르헨티나 가족에게 보내는 순간부터, 영화는 직장 드라마를 벗고 스릴러로 넘어간다. 패션계라는 배경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이야기의 무게는 상사의 변덕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몸과 자유를 누가 쥐느냐는 문제로 옮겨 간다.

토레스 감독은 초반에 두 사람의 관계를 쌓는 데 시간을 쓴다. 베아트리스는 주치의 크리스티나와 변호사 훌리오를 곁에 두고 소피아가 합의를 지키도록 단단히 못을 박는다. 소피아는 한동안 돈을 받고 누리는 휴가처럼 저택에서 지낸다. 균열은 집 안에서 숨겨진 카메라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소피아가 따지자 베아트리스는 실내 카메라만 끄고 바깥 카메라는 안전을 위해서라며 남겨 둔다. 양보하는 시늉만 하고 감시는 그대로 두는 이 타협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대목이다. 이후 소피아의 휴대전화가 사라져 나초와 바깥세상이 끊기고, 크리스티나가 짠 일과는 그녀를 탈진할 때까지 몰아붙이고, 집안일을 돕던 타티마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하나씩 보면 작은 조치지만, 소피아에게는 나갈 수 있는 문이 하나씩 닫히는 과정이다. 베아트리스가 이 모두를 뱃속 아이를 위해서라고 말한다는 점이 불편함을 더한다. 우울해하는 소피아를 달래겠다며 강아지를 데려오는 장면에서는 배려와 통제가 같은 손에서 나온다.

산체스-히혼은 베아트리스를 단순한 악당으로 그리지 않는다. 아이에 대한 집착과 소피아를 향한 애정이 한데 엉켜 있어서, 그녀의 통제는 보호처럼 들리다가 어느 순간 폭력이 된다. 소피아가 도망치려다 다쳤을 때 베아트리스가 먼저 확인하는 것이 아이의 안위라는 점에서 그 둘의 거리가 드러난다. 산즈는 반대편에서 소피아의 불안과 피로, 그리고 순종하는 척하는 계산을 차분히 쌓아 간다.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짜내지 않고도 갇혀 있다는 감각을 전하는 연기다. 두 배우가 한 공간에 있을 때 화면의 긴장이 가장 팽팽하다. 변호사 훌리오를 맡은 페드로 카사블랑크의 차분한 존재감과 의사 크리스티나 역의 바네사 라세로도 이 닫힌 세계에 현실감을 보탠다.

약점도 분명하다. 초반부는 인내심이 필요하고, 인물들의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지나가는 대목이 있다. 특히 후반부가 그렇다. 나초가 소피아를 찾아 저택에 다다르고, 인터폰 너머로 경찰을 부르겠다고 약속한 직후 베아트리스의 차에 치여 죽는 장면부터 영화는 갑자기 속도를 올린다. 나초라는 인물이 그전까지 충분히 그려지지 않았기에 그의 죽음은 충격은 주어도 아픔으로 닿지는 않는다. 소피아가 순종하는 척하다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베아트리스를 쓰러뜨리고, 풀려난 베아트리스와 몸싸움을 벌이다 그녀를 찌르는 마지막 몇 분도 앞서 공들여 쌓은 심리전에 비하면 서둘러 정리된 인상이다. 미묘한 조종으로 쌓은 긴장이 한순간 물리적 충돌로 쏟아지면서 균형이 무너진다. 소피아가 이력을 꾸며 베아트리스의 회사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도 뒤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 그래도 느린 호흡과 어두운 정서 덕분에 끝까지 시선을 붙드는 힘은 남는다.

이야기가 다루는 것은 힘의 불균형이다. 이민자라는 불안정한 신분과 아이를 둘러싼 거래가 한 여자를 어떻게 약하게 만드는지 영화는 계속 들여다본다. 베아트리스는 소피아에게 경제적 안정을 주는 대신 삶 전체를 요구한다. 서명한 계약서가 있어도 소피아가 정말 원해서 그 자리에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영화는 이를 대사로 설명하지 않고 계약서와 일과표, 감시 카메라라는 물건으로 보여 준다. 그 물건들이 하나씩 늘 때마다 소피아의 선택지는 줄어든다. 다만 이민자의 착취라는 주제는 제시되는 데서 그치고 깊이 파고들지는 않는다.

토레스 감독은 첫 장편에서 저택이라는 닫힌 공간에 두 사람을 세우고 정보를 조금씩 흘리는 방식을 택했다. 연출은 절제되어 있고, 과장 없이 불안을 키운다. 결말의 서두름은 아쉽다. 그래도 베아트리스가 실내 카메라만 끄고 바깥 카메라를 남겨 두던 그 장면의 서늘함은 끝까지 남는다. 러닝타임은 109분이고, 2022년 8월 31일부터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출연진

사진: The Movie Database (TMDB)

태그: , , , , ,

Google에서 추가하기

토론

댓글 0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