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이우환, 돌과 철판으로 ‘만들지 않는 예술’을 밀어붙여 온 화가

Penelope H. Fr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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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출생1936년 6월 24일
Seoul
직업화가, 조각가
수상문화공로훈장 · 호암예술상 · 레지옹 도뇌르

이우환(Lee Ufan)은 예술가로 활동한 삶의 대부분을 무언가를 덜어내는 데 바쳤다. 가공하지 않은 철판 앞에 놓인 바위 하나. 벽만 한 캔버스 위로 붓이 마를 때까지 끌어 그은 회색 선 하나. 그는 이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예술이 아니라 마주침의 예술이라 부르며, 글과 나오시마에서 베르사유에 이르는 미술관 정원에서 그 생각을 펼쳐왔다. 문제가 있다면, 최소한의 표현이 이제 너무나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수집가들은 북적이는 아트페어에서도 이우환의 작품을 단번에 알아보고, 경매회사는 선 하나의 가치를 알고 있다. 사물에서 한발 물러서려 했던 예술가는 아흔 살이 된 지금, 다섯 나라에 걸쳐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행사의 한가운데 서 있다.

아주 적은 것에서 많은 것을 읽어내는 습관은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그는 한반도 남부가 아직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절, 함안군에서 태어나 훗날 부산에서 자랐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할아버지는 집에서 서예와 수묵화, 중국 고전을 가르쳤다. 이우환은 붓보다 책을 늘 더 좋아했다고 말해왔다.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몇 달 만에 그만두고, 병든 삼촌에게 약을 전해달라는 가족의 부탁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삼촌은 그에게 일본에 남으라고 했다. 이우환은 그곳에 남아 철학을 읽었다.

1936년 6월 24일 태어난 이우환은 1961년 도쿄 니혼대학교에서 철학 학위를 받았다. 특히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 깊이 빠져 있었다.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군사정권과 마찰을 빚었고, 1960년대 중반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그림만큼이나 글쓰기에 몰두했다. 첫 개인전은 1967년 3월 도쿄 사토 갤러리에서 열렸다. 1969년에는 평론가상을 받은 논문 「From Object to Being」으로 주목받았고, 조각가 노부오 세키네(Nobuo Sekine)에 관한 글을 통해 세키네가 1968년 고베의 한 공원에서 선보인 작업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세키네는 깊은 원통형 구덩이를 파고, 파낸 흙을 기둥처럼 옆에 세웠다. 이 작품 Phase—Mother Earth는 모노하(Mono-ha), 즉 ‘사물의 학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우환은 모노하의 이론가이자 가장 유창한 대변자가 되었다. 1971년 In Search of Encounter로 묶여 나온 그의 글은 예술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을 멈추고, 사물과 사람, 공간을 서로 만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대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각은 글의 뒤를 이었다. Phenomena and Perception B에서는 유리판 위에 돌을 떨어뜨리고 금이 가는 방향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1970년대 초부터 그의 조각 작품에는 거의 모두 Relatum이라는 하나의 제목이 붙었다. 철판과 유리, 솜이나 고무 곁에 놓인 돌은 각각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관계를 이룬다. 40년 뒤 그는 구겐하임에서 유리판 위에 돌을 들고 몸을 웅크린 채 이 작업을 다시 선보였다.

회화는 한층 엄격한 형태로 돌아왔다. 1973년 도쿄 갤러리에서 처음 선보인 From Point와 From Line 연작에는 동물 가죽 아교에 광물 안료를 개어 사용했다. 그 재료는 그가 익혀온 일본화 전통의 것이었다. 안료를 묻힌 붓은 한 번만 사용하고, 붓이 다할 때까지 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 점과 선은 숨이 잦아들 듯 캔버스 위에서 점점 희미해진다. 1975년 이우환은 같은 갤러리에서 열린 《Five Korean Artists, Five Kinds of White》의 기획에 참여했다. 박서보(Park Seo-bo)를 비롯한 화가 다섯 명이 참여한 이 전시는 한국 단색화, 즉 단색화 운동의 출발을 알렸다. 그는 1973년부터 2007년까지 다마미술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오랫동안 가마쿠라와 파리를 오가며 생활해왔다.

후기 작업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덜어냈다. 1987년부터 1991년 사이에 그린 With Winds에서는 더 느슨하고 빠른 붓질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1991년에 시작한 Correspondence에서는 캔버스에 유화 물감과 으깬 돌로 그린 회청색 자국 한두 개만 남겼다. 지난 20년 동안 이어온 Dialogue 연작은 여러 겹을 쌓아 만든 네모난 붓질 하나를 넓은 흰 화면에 놓는다. 주요 기관들도 그를 잇달아 조명했다. 2011년 구겐하임에서 미국 첫 회고전이 열렸고, 2014년에는 베르사유 정원이 그의 무대가 되었다. 2019년에는 워싱턴의 허시혼 미술관 광장 전체가 작품으로 채워졌다.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은 세 곳이다. 2010년 안도 다다오(Tadao Ando)가 설계한 나오시마 섬의 미술관, 2015년 문을 연 부산의 Space Lee Ufan, 그리고 안도가 개조한 저택에 2022년 문을 연 Lee Ufan Arles다.

성공을 거둔 바로 그 지점에서 논쟁은 불편한 국면을 맞는다. 만들지 않는 예술은 예상외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되었고, 회색 선 하나는 알아보기 쉬운 만큼 시장이 깨달았듯 모방하기도 쉬웠다. 1976년작 From Line 연작의 한 캔버스는 2014년 소더비 경매에서 216만 5,000달러에 팔렸다. 2000년부터 2011년 사이 한국 경매에서 최고가 100위 안에 든 이우환의 작품 수는 다른 어떤 작가보다 많았다. 2016년 서울경찰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이우환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 13점을 위작으로 판정했다. 이우환은 직접 그림들을 살펴본 뒤 자신의 작품이라고 밝혔고, 수사관들이 일부 작품이 위작이라는 점을 인정하라고 압박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법원은 경찰의 손을 들어줬다. 2017년 서울 법원은 위작을 만든 화가와 유통업자들에게 최대 7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작품에서 자아를 빼내야 한다고 말하는 예술가를 둘러싸고 불편한 질문이 남았다. 손의 흔적이 그토록 중요하지 않다면,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 누가 판단하는가? 미술사학자 조앤 키(Joan Kee)는 한때 그를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라 불렀다. 그 말은 양쪽으로 모두 날을 세운다.

이런 일들도 그의 작업을 늦추지는 못했다. 이우환은 6월 24일 아흔 살이 되었고, 올해 일정은 그의 생일을 중심으로 짜였다. Dia는 5월 Dia Beacon에서 장기 전시를 시작했다. 이 전시는 이우환이 2025년 재단에 기증한 회화 여덟 점을 바탕으로 구성됐다. 베니스의 산 마르코 아트 센터에서는 비엔날레 연계 행사로 그의 작품을 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으며, 11월 22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7월에는 아비뇽 교황청(Palais des Papes)에서 예배당과 부엌, 회랑에 맞춰 새롭게 구성한 설치 작품 네 점을 공개했다. 프랑스와 한국의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가운데 하나로, 전시는 11월 15일까지 이어진다. 10월 16일 포르투의 세랄베스 재단은 포르투갈에서 열리는 그의 첫 대규모 전시 《Fragments of Infinity》를 개막한다. 빌라를 위해 제작한 회화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그다음은 쾰른이다. 루트비히 미술관은 11월 6일 이우환에게 볼프강 한 상을 수여하고, 다음 날부터 개인전을 연다. 전시는 2027년 4월 4일까지 이어지며, 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소장품으로 구입하기 위해 최대 10만 유로를 배정했다. 이우환은 돌이 그것을 놓는 손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늘 말해왔다. 올가을 포르투와 아비뇽에서처럼 쾰른에서도 그 손은 여전히 그의 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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