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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리, ‘인간문화재 손녀’에서 ‘카터’의 목소리로…속내를 숨기는 얼굴의 배우

Penelope H. Fr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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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길 감독의 Carter 1막 대부분에서 정소리는 화면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기억도 나지 않는 임무를 수행하는 기억상실 요원을 이끄는 북한군 장교 한정희다. 차분하면서도 지나치게 확신에 찬 말투를 지녔다. 감독은 정소리에게 기계처럼 말하되 감정을 조금은 새어 나오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세계 관객에게 처음 자신을 알리는 방식으로는 더없이 잘 어울렸다. 정소리는 목소리가 되도록 길러졌다. 대대로 국악을 연주해온 집안 출신인 국악인 부모는 딸이 판소리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리꾼의 뿌리가 되는 말 ‘소리’를 이름에 담아 ‘소리’라고 지었다.

“결국 이름대로 살게 되는 것 같아요.” 정소리는 Esquire Korea에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업계가 정소리에게 맡겨온 것은 다른 역할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사람 말이다.

정소리는 다섯 살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 1998년 태어난 뒤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전북 전주였고, 여섯 살 무렵 가족이 경남 양산으로 이사한 뒤 그곳에서 자랐다. 모두가 밖에 나가 놀 때 스포츠 단지에서 판소리 대목인 심청가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고, 당시에는 그 일이 싫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십 대가 되었을 무렵에는 공연 한 번에 관객 천 명이 모이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영화 촬영장도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 부산예술고등학교에서는 12현 가야금을 연주하며 노래하는 가야금병창을 전공했다. 경복궁에서 춘향가 중 옥중의 한을 담은 대목 ‘쑥대머리’를 부르는 영상은 지금도 널리 공유된다.

영화계로 향하는 길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열렸다. 2016년 아직 학생이던 정소리는 Mnet 너의 목소리가 보여 시즌3에 ‘인간문화재 손녀’로 소개돼 한복을 입고 윤복희의 ‘여러분’을 국악으로 편곡해 불렀다. 영화 공작에서 북한 보위부 요원 역을 맡길 신인을 찾던 윤종빈 감독은 그 영상을 보고 정소리를 불렀다. 몇 차례 오디션을 거쳐 정소리는 황정민의 이중간첩을 감시하는 국가보위부 요원 이홍설 역을 따냈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정소리는 스스로 말하길 촬영 경험이 전혀 없었다. 시장에서 황정민을 뒤쫓는 장면을 찍던 첫날, 황정민에게 몇 걸음쯤 가다가 돌아설 예정인지 정확히 물어볼 정도였다. 선배 배우들이 계속 연기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확답을 피했지만, 촬영 종료 파티에서는 연기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작은 배역을 하나씩 맡으며 경험을 쌓았다. 웹드라마와 구미호 카페에 출연했고, 인기 많은 학생이면서 가정의 균열을 숨기는 주인공을 맡은 캐스트: 인싸전성시대에 이어 넷플릭스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에서는 간호사 역을 연기했다. 그러다 세 작품이 거의 동시에 찾아왔다. Apple TV+ 파친코에서는 부유한 한국인 집안의 딸 지윤을 맡았고, 시즌2에서도 같은 역으로 돌아왔다. 촬영을 위해 캐나다에서 격리 생활을 하던 중 상대역 없이 셀프테이프를 찍어 Carter 오디션에 보냈고, 네 차례 오디션 끝에 출연이 결정됐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서는 PC방 아르바이트생 역으로 짧은 장면 하나를 따냈다. 자라면서 익숙해진 부산 사투리로 연기했으며, 두세 번 촬영한 뒤 마무리했고 박찬욱 감독과 박해일이 배려해줬다고 말했다.

Carter에서는 가장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이홍설의 말투보다 서울말에 가까운 북한식 말투를 새로 익히기 위해 사투리 코치와 매일 이야기하고, 교정을 받으려고 북한 말투로 일기도 썼다. 상대 배우 주원이 스턴트를 직접 소화하는 모습을 본 뒤 와이어 액션도 직접 해냈다. 전통 창법으로 보컬을 녹음해 음악에도 자신의 수련을 담았다. 이후 U+모바일tv의 밤이 되었습니다에서는 학급 전체가 목숨을 건 마피아 게임에 휘말리는 고등학교 스릴러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구든 조종하려는 부반장 김소미를 연기했다. 이 작품은 넷플릭스 한국 톱10에서 3위까지 올랐다. 임대웅 감독은 정소리가 Carter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점을 눈여겨보고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MBC 시대극 코미디 밤에 피는 꽃에서는 수도에서 가장 위세 높은 집안의 딸 석재이 역을 맡았다. 석재이는 오빠의 죽음을 과부가 된 올케 탓으로 돌리는데, 올케 역은 정소리처럼 국악을 배운 배우 이하늬가 연기했다.

이 작품들을 늘어놓고 보면 패턴은 점점 뚜렷해진다. 첫 네 편의 영화 가운데 두 편에서 북한 요원 역을 맡았다. 왜 그런 역할을 맡겼느냐고 감독들에게 물었더니 두 사람 모두 같은 답을 했다. 가만히 있을 때 얼굴에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정보 전달자, 요원, 책략가, 원한을 품은 귀족까지, 이후 맡은 역할 대부분은 무언가를 감추는 여성으로 정의됐다. 선택할 기회도 얻기 전에 재능이 굴레가 된 셈이다. 인터뷰에서 정소리는 자신이 아직 맡아보지 못한 역할을 꾸준히 이야기한다. 가벼운 로맨스의 주인공, 엉뚱한 인물, 이번에는 남한 사람, 자신이 가장 많이 봤다는 부산 성장 영화 Wish의 정우처럼 꾸밈없는 인물, 또는 A Star Is Born 같은 음악 영화 말이다. 그사이 관련 기사는 여전히 예능 출연 당시의 수식어로 시작한다. 데뷔 8년이 지난 뒤에도 국내 연예 매체들은 새 시리즈 제작발표회에서 그를 너의 목소리가 보여의 ‘국악 소녀’로 다시 소개했다. 20년 동안 갈고닦은 목소리는 그의 이력을 알리는 데 쓰이지만, 그 목소리를 중심에 둔 역할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새 시리즈는 블러디 플라워였다. 열일곱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면서 불치병까지 치료할 수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린 8부작 Disney+ 미스터리 스릴러다. 정소리는 성동일이 연기한 박한준의 충직한 보좌관 윤민경 역을 맡았다. 려운이 연기하는 이우겸의 사건 뒤에 숨은 진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스포츠경향은 선과 악 사이에 놓인 인물을 절제된 연기로 표현했다고 호평했다. 이 시리즈는 2026년 2월 4일 공개를 시작해 매주 두 편씩 선보였다. 다음 날 지진희의 소속사인 이끌엔터테인먼트는 정소리와 전속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정소리는 사람엔터테인먼트와 수년간 함께한 뒤 새 둥지를 찾았다.

아직 차기작은 발표되지 않았다. 정소리는 죽는 날까지 국악을 놓지 않겠지만 당분간 연기에 우선순위를 두겠다고 말했다. 두 분야를 별개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얼굴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때도 목소리는 여전히 자기 몫을 해내기 때문이다. 다음 캐스팅이 답해줄 질문은 하나다. 누군가 정소리가 더는 숨지 않아도 되는 역할을 맡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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