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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 브로디, 최연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서 역대 최장 수상 소감까지

Penelope H. Fr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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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 브로디
에이드리언 브로디
Photo: PhilipRomanoPhoto /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출생1973년 4월 14일
New York City, New York, USA
직업배우
대표작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피아니스트, 판타스틱 Mr. 폭스
수상Satellite 상 · 아카데미상 · National Society of Film Critics Award for Best Actor · Boston Society of Film Critics Award for Best Actor · 세자르상 · Black Reel Award for Best (공동) · 골든글로브상 · Time 100 · BAFTA · 크리틱스 초이스상 · New York Film Critics Circle Award for Best Actor · Ellis Island Medal of Honor

애드리언 브로디의 대중적 삶을 규정하는 두 밤이 있다. 두 번 모두 같은 무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첫 번째 밤, 깡마르고 놀란 기색이 역력한 청년은 계단을 뛰어 올라가 시상자에게 달려들어 키스한 뒤, 쿠웨이트에서 군 복무 중인 퀸스 출신 친구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멈춰 세웠다. 두 번째 밤의 그는 관자놀이가 희끗한 베테랑 배우였다. 무대에 오르며 껌을 파트너에게 툭 던진 그는 아카데미상을 든 채 마이크를 잡은 사람 가운데 누구보다 긴 5분 40초 동안 말을 이어갔다. 한 밤은 그를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만들었다. 다른 한 밤은 시상식 역사상 가장 긴 수상 소감을 남긴 배우로 만들었다.

두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렵다. 바로 그 설명의 어려움이 브로디라는 배우를 가장 흥미롭게 만든다. 할리우드는 대개 배우를 프랜차이즈의 주연으로 키워내는 상을 그에게 안겼지만, 브로디는 그 뒤 20년 동안 그런 배우처럼 행동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복화술사, 고릴라에게 쫓기는 각본가, 가죽 코트를 입은 웨스 앤더슨 영화의 악당, 코뿔소에 집착하는 초현실주의 화가, 머리를 뒤로 넘긴 농구 코치로 변신했다. 물고기와 핫도그를 그려 아트 페어에서 팔았고, 자신이 자란 동네를 배경으로 한 짧은 복수극의 각본과 음악을 맡았다. 두 번째 오스카를 안겨준 The Brutalist가 마침내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이를 화려한 복귀라기보다 하나의 사실을 다시 일깨우는 일로 받아들였다. 한때 단 하나의 배역으로 기억되던 배우는 그저 다른 곳에서 계속 일하고 있었을 뿐이다.

퀸스에서 사진가의 아들로 자라다

애드리언 니컬러스 브로디는 퀸스의 우드헤이븐에서 자랐다. 이미지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두 사람의 외동아들이었다. 어머니 실비아 플라치는 헝가리 태생의 사진가로, 그녀의 사진은 수십 년 동안 Village Voice에 실렸다. 플라치는 1956년 소련의 무력 진압 이후 부모와 함께 어린 나이에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아버지 엘리엇 브로디는 역사를 가르치고 그림을 그렸으며, 홀로코스트 때 친척을 잃은 폴란드계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다. 플라치 역시 가톨릭 신자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어머니의 가족도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브로디는 1973년 4월 14일, 실향의 역사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가족의 삶 그 자체였던 집에서 태어났다. 식탁 위에서는 구도와 빛, 기억이 자연스레 오갔다.

그는 어린 시절 상당 기간 뉴욕 곳곳의 취재 현장에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소년 시절 늘 카메라에 찍힌 덕분에 렌즈 앞에서 유난히 편안해졌고, 어머니가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연기를 알기도 전에 인내심을 배웠다고 말해왔다. 그의 첫 무대는 극장이 아니었다. ‘어메이징 애드리언’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생일 파티에서 마술을 선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작은 사업이었고, 그는 훗날 이를 관객의 관심을 붙드는 법을 처음 배운 경험이라고 했다.

부모는 그가 바쁘게 지내며 동네의 이런저런 문제에 휘말리지 않도록 연기 수업을 권했다. 브로디는 열세 살 무렵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에 출연했다. 이후 동문 명단이 캐스팅 디렉터의 출연자 목록처럼 보이는 맨해튼의 피오렐로 H. 라과디아 음악·예술·공연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아메리칸 아카데미 오브 드라마틱 아츠에서도 수업을 들었다. 졸업 후 스토니브룩 대학교와 퀸스 칼리지에 잠시 다녔지만, 이미 연기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길고 긴 수련기

브로디의 첫 스크린 출연작은 PBS의 1988년 TV 영화 Home at Last였다. 같은 해 CBS 시트콤 Annie McGuire의 고정 배역도 맡았지만, 작품은 몇 회 만에 막을 내렸다. 이듬해에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New York Stories의 한 에피소드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당시에는 앞으로 펼쳐질 일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후 10년 가까이 브로디는 뉴욕의 젊은 배우들이 흔히 그렇듯 꾸준히 일했지만, 화면의 중심에 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가 진정한 출발점으로 꼽는 작품은 1993년 스티븐 소더버그가 출연을 제안한 대공황 시대 성장 드라마 King of the Hill이다. 브로디는 매력적이면서도 약간 위험한 연상의 소년 레스터를 연기했고, 이 작품으로 처음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Angels in the Outfield와 미키 루크, 투팍 샤커와 함께 출연한 범죄 드라마 Bullet에서 조연을 맡았다. 스튜디오보다 독립영화계가 그를 더 진지하게 눈여겨봤다. Restaurant에서 바텐더이자 극작가 지망생을 연기해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1999년에는 스파이크 리의 Summer of Sam과 배리 레빈슨의 Liberty Heights에서 서로 다른 두 미국 동네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 시기에는 업계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를 빚어낸 좌절도 있었다. 테런스 맬릭은 The Thin Red Line에서 브로디를 파이프 상병 역으로 캐스팅했고, 한동안 이 인물은 영화의 감정적 중심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맬릭은 편집실에서 몇 달을 보내며 전쟁 영화의 무게중심을 다른 인물들에게로 옮겼다. 영화가 개봉했을 때 브로디의 출연 분량은 몇 분에 불과했고 대사도 두어 줄뿐이었다. 그는 시사회에서야 편집 결과를 알게 됐다. 훗날 인터뷰에서 브로디는 그 일을 꽤 너그럽게 돌아보며, 당시 갑작스러운 명성이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해를 끼쳤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경험은 배우가 최종 화면에 담기는 내용 가운데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알게 했다. 훗날 제작과 각본 작업에 나서게 된 것도 이 깨달음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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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ianist와 완전히 몰입한 대가

로만 폴란스키는 발칸반도를 배경으로 한 전쟁 드라마 Harrison’s Flowers에서 브로디를 눈여겨봤고, 2001년 그를 The Pianist의 브와디스와프 슈필만 역에 캐스팅했다. 슈필만은 바르샤바 게토가 파괴되는 와중에 도시의 폐허에 숨어 살아남은 실존 폴란드계 유대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그의 회고록은 배우에게 굶주림과 고립, 서서히 사라져가는 자아를 연기하도록 요구했다. 브로디는 그 요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파트와 자동차를 처분하고 전화선을 끊었으며, 이미 마른 체격에서 약 30파운드를 더 감량해 몸무게를 약 130파운드까지 줄였다. 손이 건반 위에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쇼팽의 곡을 하루에도 몇 시간씩 연습했다.

그는 수개월에 걸친 준비 과정을 개인적 위기와도 같은 시간으로 이야기해왔다. 고립된 생활 탓에 상실감과 우울감이 생겼고, 촬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가족의 역사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브로디는 아버지 쪽 가족이 폴란드에서 잃은 것과 어머니가 어린 시절 헝가리에서 가져온 기억을 연기에 녹여냈다. 그는 이 작품이 그저 또 하나의 배역일 뿐이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 결과는 놀라울 만큼 절제된 신체적·감정적 연기였고, 시상식 시즌의 판도를 뒤집었다. 브로디는 BAFTA와 골든 글로브, 미국배우조합상에서 수상하지 못했지만, 2003년 3월 대니얼 데이루이스, 잭 니컬슨, 마이클 케인, 니컬러스 케이지를 제치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29세에 이 부문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됐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른 살 이전에 남우주연상을 받은 유일한 배우로 남아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 영화로 세자르상 남우주연상도 받았다. 미국 배우가 이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할리 베리가 트로피를 건네자 브로디가 그녀에게 입을 맞춘 장면은 오스카 역사상 가장 많이 다시 본 순간 가운데 하나가 됐다. 2025년 두 사람은 시상식에 앞서 레드카펫에서 장난스럽게 그 장면을 재연했다.

뻔한 길을 거부하다

오스카 수상으로 문이 열렸고, 브로디는 일부러 그중 몇 개를 엉뚱한 방향으로 통과했다. 권위 있는 주연작을 잇달아 맡는 대신, 밖에서 보기에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려는 듯한 선택을 이어갔다. 독립 코미디 Dummy에서는 외로운 복화술사를 연기했다. M. 나이트 샤말란의 The Village에서는 발달장애가 있는 청년 노아 퍼시 역을 맡았다. The Jacket에서는 악몽 같은 병원에 갇힌 걸프전 참전 용사를, Hollywoodland에서는 TV 슈퍼맨 조지 리브스의 죽음을 파헤치는 삼류 형사를 연기했다.

애드리언 브로디
The Village(2004)의 애드리언 브로디

예외는 피터 잭슨의 King Kong이었다. 브로디는 나오미 왓츠와 덩치 큰 컴퓨터 그래픽 고릴라를 마주하며 각본가 잭 드리스콜을 연기했다. 이 작품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큰 흥행작이었고, 블록버스터를 이끌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블록버스터로 이어가지 않았다. 대신 평생 가장 꾸준히 이어진 창작 파트너십이 시작됐다. 웨스 앤더슨은 그를 The Darjeeling Limited의 불안한 둘째 형제로 캐스팅했고, 이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Fantastic Mr. Fox에서는 들쥐로, The Grand Budapest Hotel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살인적인 후계자 드미트리로 기용했다. 브로디는 The French Dispatch에서 미술품 거래상으로, Asteroid City에서는 연극 연출가로 다시 앤더슨과 작업했다. 앤더슨 특유의 정교하고 무표정한 세계는 고요함을 웃음으로 바꾸는 배우에게 잘 맞았다. 영화 전체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 없이 연기할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다른 작품에서의 선택은 계속 예상 밖으로 뻗어 나갔다. 우디 앨런의 Midnight in Paris에서는 살바도르 달리로 출연해 코뿔소에 집착하는 허세 가득한 장면 하나를 선보였고, 관객들은 지금도 그 대사를 인용한다. 빈센조 나탈리의 Splice에서는 몹시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유전공학자를, Predators에서는 외계 정글에서 쫓기는 용병을 연기했다. 토니 케이의 Detachment에서는 무너져가는 학교를 떠도는 기간제 교사로 가장 솔직하고 대담한 연기 가운데 하나를 보여줬으며, 영화의 총괄 프로듀서도 맡았다.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제작사 Fable House를 세우고 Giallo, Wrecked, Manhattan Night 같은 저예산 영화 제작에 나섰다.

텔레비전, 그리고 눈앞에서 펼쳐진 두 번째 경력

영화배우들이 명망 있는 TV 드라마로 향하는 일이 당연해지기 한참 전부터, 브로디는 텔레비전에서 더 큰 도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2014년에는 히스토리 채널 미니시리즈 Houdini에서 탈출 마술사 해리 후디니를 연기했다. 어린 시절 마술을 선보였던 경험을 살린 배역으로, 프라임타임 에미상과 미국배우조합상 후보에 올랐다. 2017년에는 Peaky Blinders 시즌 4에 루카 창레타 역으로 등장했다. 셸비 가문에 복수하러 버밍엄에 온 뉴욕 마피아 보스의 위협적인 연기는 지금도 이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이 흐름은 2020년대에도 이어졌다. HBO 드라마 Succession에서는 행동주의 투자자 조시 애런슨을 연기했다. 그는 로건 로이를 끌고 로이 소유의 섬을 걷게 하며 굴욕을 안겼고, 두 에피소드 출연으로 에미상 드라마 부문 게스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스티븐 킹 원작을 각색한 Chapelwaite에서는 저주받은 집안의 저택으로 이사하는 19세기 홀아비 역을 맡았으며, 시리즈의 총괄 프로듀서로도 이름을 올렸다. Winning Time: The Rise of the Lakers Dynasty에서는 팻 라일리 감독을 야망과 헤어젤의 인물로 그려냈고, 라이언 존슨의 Poker Face 시즌 1에서는 나타샤 리온과 함께 카지노 재벌 상속자를 연기했다. 영화에서는 추리극 See How They Run의 할리우드 감독, Blonde의 극작가 아서 밀러, 액션 코미디 Ghosted의 악당으로 등장했다.

이 시기 가장 개인적인 프로젝트는 폭력적인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쓰레기 수거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2021년 복수극 Clean이었다. 브로디는 각본을 공동 집필하고 제작과 주연을 맡았으며 음악까지 작곡했다. 자신이 자란 뉴욕의 거친 면모를 담은 작품이라고 설명해왔다. 흥행 성적은 소박했지만, 그의 야망이 단순한 연기를 넘어 작품의 창작자가 되는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뉴욕 북부에서 매입해 복원한 역사적 건축물에 관한 다큐멘터리 Stone Barn Castle의 음악도 작곡했다.

The Brutalist와 오스카 무대의 두 번째 밤

모나 패스트볼드와 함께 각본을 쓴 브래디 코벳의 The Brutalist는 브로디가 수년 동안 맴돌면서도 좀처럼 닿지 못했던 종류의 프로젝트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전쟁이 끝난 뒤 펜실베이니아에 도착한 가상의 헝가리계 유대인 건축가 라슬로 토트를 연기한다. 토트는 가이 피어스가 연기한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 리 밴 뷰런의 눈에 들어 그의 후원을 받지만, 서서히 그에게 잠식당한다. 토트의 아내 에르제베트 역은 펠리시티 존스가 맡았다. 영화는 2024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고, 코벳은 감독상을 수상했다. 인터미션을 포함한 상영 시간은 약 3시간 30분이었다.

애드리언 브로디
The Brutalist(2024)의 애드리언 브로디

브로디에게 이 이야기는 불편할 만큼 개인적인 경험과 맞닿아 있었다. 토트가 헝가리를 떠나는 과정은 그의 어머니와 조부모가 1950년대에 고향을 떠난 일을 떠올리게 했다. 브로디는 인물의 영어 억양을 만드는 데 할아버지의 억양을 일부 참고했다고 말했다. 건축가의 고집스러운 예술적 비전과 평생 사진에 헌신한 어머니의 삶도 연결해 생각했다. 영화는 1960년대 이후 사실상 사라진 와이드스크린 포맷 비스타비전으로 촬영됐다. 일부 극장에서는 70mm 필름으로 상영됐고, 이러한 기술적 야심은 작품의 명성에도 한몫했다.

이후 이어진 시상식 시즌은 거의 완벽한 승리의 행진이었다. 브로디는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영화 드라마 부문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 크리틱스 초이스상, BAFTA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2025년 3월 2일 열린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첫 수상 이후 22년 만에 두 번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영화는 롤 크롤리의 촬영과 대니얼 블럼버그의 음악상까지 모두 세 개의 오스카를 받았다. 브로디의 수상 기록은 이제 후보 두 차례, 수상 두 차례다.

그의 수상 소감은 5분 40초 동안 이어져 그리어 가슨이 1943년부터 지켜온 기록을 넘어섰다. 오케스트라가 퇴장을 재촉하듯 연주를 시작하자, 브로디는 2003년 그랬던 것처럼 연주를 멈춰달라고 요청한 뒤 전쟁의 여파와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그리고 자신이 말했듯 언제든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불안정한 배우의 삶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조지나 채프먼과 그녀의 자녀들, 그리고 부모에게 감사를 전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감동적이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저 길었다고 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를 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두 달 뒤인 2025년 5월, 브로디는 미국의 이민 역사를 삶으로 보여준 이들에게 수여하는 엘리스 아일랜드 명예 훈장을 받았다. 그가 맡은 배역의 궤적과 이보다 더 정확히 맞아떨어지기 어려운 영예였다.

시상식 시즌이 비켜간 논란

이 승리에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정하게 돌아보려면 그 점도 짚어야 한다. 오스카 시상식을 몇 주 앞두고 영화 편집자는 브로디와 존스가 구사한 헝가리어 대사를 다듬는 데 인공지능 음성 도구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일부 건축 이미지를 만드는 데 생성형 도구도 쓰였다고 시사했다. 코벳은 배우들의 연기는 전적으로 본인들의 것이며, 외국어 화자에게 특히 어려운 언어인 헝가리어의 모음 소리를 소프트웨어로 다듬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화면에 등장하는 건물은 손으로 그렸다고도 덧붙였다. 이 해명에도 허용 가능한 후반 작업의 범위를 둘러싼 더 큰 논쟁은 멈추지 않았다. 브로디가 그 결정에 관여했는지와 무관하게 The Brutalist는 논쟁의 화제로 떠올랐다.

비평가들은 다른 의문도 제기했다. 일부 건축 평론가들은 영화가 브루탈리즘을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이들은 토트의 전기가 실존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의 삶을 상당 부분 빌려오면서도 그 인물을 허구로 제시한다고 지적했다. 긴 상영 시간도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브로디 자신의 명성에도 다른 종류의 복잡함이 따라붙었다. 평단이 그의 연기에서 높이 평가한 강렬함은 수년간 일부 논평가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심각한 태도로 묘사되기도 했고, 긴 오스카 수상 소감은 한동안 그런 고정관념을 되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연기는 침묵과, 또다시 타격을 받을 것처럼 늘 긴장한 몸을 바탕으로 한 절제의 표현이었다.

촬영장을 떠나 그림을 그리는 배우

브로디에게 그림은 취미가 아니다. 여러 차례 전시를 열어온, 독자적인 역사를 지닌 또 하나의 창작 활동이다. 아버지의 캔버스와 어머니의 사진에 둘러싸여 자란 그는 한때 연기를 잠시 멈추고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의 전시에는 ‘Hooked’, ‘Hotdogs, Hamburgers and Handguns’, ‘Metamorphosis: Transformations of the Soul’ 같은 제목이 붙었다. 작품은 팝아트 이미지에 가까우며,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와 패스트푸드, 소비와 폭력, 환경에 대한 경고로 뒤틀린 브랜드 로고 등을 담는다. 일부 작품은 자선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팔렸지만 온라인에서는 수집가들보다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브로디는 그림을 그릴 때는 누구에게도 답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 감독과 편집자, 마케팅 부서가 배우의 작업을 좌우하는 영화 현장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음악 작업도 그림과 나란히 이어진다. Clean의 음악은 물론 Stone Barn Castle의 음악도 그가 맡았다. 작곡은 카메라 앞에서 탐구하는 것과 같은 소재로 다가가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여긴다. 이 모든 활동을 관통하는 핵심은 통제권이다. 캔버스 앞에서든 건반 앞에서든, 자신이 만든 것을 편집실에서 몇 분 분량으로 잘라낼 수는 없다. 첫 번째 주요 배역이 겪었던 일이기도 하다. 화가이자 작곡가인 브로디에게서 The Thin Red Line의 젊은 배우가 겪었던 일을 보완하려는 마음을 읽지 않기란 어렵다.

돈마에서 브로드웨이까지

두 번째 오스카를 받은 뒤라면 영화 출연 제안을 받아 성공을 이어가는 것이 뻔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브로디는 무대를 택했다. 시상식 시즌이 절정에 이르기도 전인 2024년 가을, 런던 돈마 웨어하우스에서 린지 페렌티노의 연극 The Fear of 13에 출연하며 런던 연극 무대에 데뷔했다. 이 작품은 저지르지 않은 살인죄로 20년 넘게 사형수 수용동에 갇혀 있다가 DNA 증거로 누명을 벗은 펜실베이니아 남성 닉 야리스의 이야기다. 저스틴 마틴이 연출을 맡았고, 브로디는 이 연기로 2025년 로런스 올리비에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작품은 2026년 새 연출가 데이비드 크로머와 새 상대 배우 테사 톰프슨을 맞아 브로드웨이로 옮겨갔다. 톰프슨은 야리스의 삶을 바꿔놓는 교도소 자원봉사자를 연기했다. 두 배우 모두 브로드웨이 데뷔였다. 2026년 3월 19일 제임스 얼 존스 극장에서 프리뷰 공연을 시작했고, 4월 15일 개막해 16주 한정 공연에 들어갔다. 미국 평단의 반응은 런던 평단보다 신중했다. 대체로 두 주연 배우의 연기를 호평하면서도 작품 자체가 구조적 한계에 갇혀 있다고 봤다. 봄에 토니상 후보가 발표됐을 때 The Fear of 13은 조명상과 음향 디자인상, 두 부문에만 이름을 올렸다. 브로디는 남우주연상 후보에서 제외됐고, 이는 그해 가장 많이 회자된 후보 누락 사례 가운데 하나가 됐다. 다른 곳에서 막 큰 찬사를 받은 배우에게도 연극계에는 나름의 평가 기준이 있고, 그는 그 기준으로 심판받는 길을 택했다는 사실을 일깨운 순간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작품들

브로디의 일정표를 보면 속도를 늦출 생각은 없어 보인다. 2026년 5월에는 브라질 감독 카림 아이누즈의 부녀 드라마 Last Dance에 레이철 지글러, 벤 플랫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한다고 발표됐다. 그는 1991년 딸을 데리고 카리브해를 도는 게이 크루즈에 오르는 유명 브로드웨이 작곡가 엘리엇 역을 맡는다. 플랫은 영화의 오리지널 음악도 쓴다. 여름에는 더그 라이먼 감독의 스릴러 Snake Island를 촬영하기 위해 자그레브에 머물렀다. 숀 펜이 함께 출연하는 이 작품은 2022년 발트해 해저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을 파괴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 촬영은 7월 시작됐으며 2026년 9월 말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브로디는 16세기 통치자 카를 5세를 연기하는 리 타마호리 감독의 시대극 Emperor에도 출연할 예정이지만, 개봉 시기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사생활

브로디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의 인상보다 사생활을 더 철저히 지킨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스페인 배우 엘사 파타키와 교제했고, 이후에는 모델 라라 리에토와 몇 년간 만났다. 2019년 무렵부터는 영국 패션 디자이너이자 브랜드 Marchesa의 공동 창립자인 조지나 채프먼과 함께하고 있다. 그는 오스카 무대에서 채프먼과 그녀의 두 자녀에게 감사를 전했다. 브로디에게는 친자녀가 없다. 부모는 지금도 그의 삶에서 변함없이 중요한 존재다. 실비아 플라치는 평생 아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왔고, 브로디는 부모에게서 배운 점을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물다.

계속해서 화면의 틀을 바꾸는 배우

애드리언 브로디의 경력을 홀로코스트의 그림자가 드리운 두 작품 The Pianist와 The Brutalist 사이를 잇는 직선으로 읽고 싶어질 수도 있다. 두 작품 모두 퀸스 출신 사진가의 아들이 지닌 가족사를 끌어안고 있다. 그런 흐름이 존재하고, 두 차례의 오스카 수상은 이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그 사이에 그가 실제로 해온 일 대부분을 놓치게 된다. 앤더슨의 코미디와 TV 속 악당들, 작곡과 그림, 직접 쓴 쓰레기 수거 노동자에 관한 작은 영화, 그리고 일주일에 여덟 번씩 자신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는 비평가들 앞에 서기로 한 선택이 빠진다.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자는 20년 뒤 가장 오래 말한 배우가 됐다. 그 두 기록 사이의 간극 속에 더 흥미로운 배우가 줄곧 숨어 있었다. 다음 도전도 이미 일정표에 올라 있다. 아버지와 딸의 크루즈선 드라마, 그리고 발트해 해저 잠수부들을 다룬 스릴러다. 두 번이나 오스카를 받은 배우에게 뻔한 선택은 아니다. 브로디는 좀처럼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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