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그랜트 우드, 〈아메리칸 고딕〉이 풍자가 아니라고 끝까지 말한 화가

Penelope H. Fr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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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 우드
그랜트 우드
Photo: Grant Wood /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출생1891년 2월 13일
Anamosa
사망1942년 2월 12일 (50)
직업화가

세대를 거쳐 만화가들이 그렇게 여겨왔듯, 단서는 쇠스랑에 있다. 뾰족한 고딕식 창 아래 굳은 표정의 두 인물을 그린 그랜트 우드의 이중 초상화는 소도시의 경건함을 비꼰 그림으로 너무나 자주 해석돼, 작가의 부인마저 농담의 일부처럼 들릴 정도다. 그래도 우드는 거듭 부인했다. 그는 “저 집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그렸다”고 말했고, 짧은 화가 인생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들처럼 옷을 입고 말하려 했다.

그의 이야기 한가운데에는 이 모순이 놓여 있다. 미국 화가들에게 파리는 잊고 중서부를 그리라고 외친 지역주의의 얼굴이 된 남자는 정작 파리에서 공부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언론 앞에서 멜빵 작업복 차림으로 포즈를 취했다. 그 작업복이 신념의 표현이었는지 변장이었는지는 그의 전기 작가들이 줄곧 던져온 질문이다.

그랜트 데볼슨 우드는 1891년 2월 13일 아이오와주 애너모사 인근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는 훗날 Arbor Day에 그려 넣을 작은 교사에서 공부했는데, 이 그림은 2004년 미국 조폐국이 아이오와주 기념 25센트 동전에 사용했다. 190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은 시더래피즈로 이사했고, 우드는 열네 살 때 분필화로 전국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그가 진정으로 배운 것은 미술공예운동이었다. 1910년 미니애폴리스 디자인·수공예학교에서 여름을 보냈고, 이어 시카고에서 3년간 칼로 은세공 공방과 자신의 짧은 보석 사업에서 일했다. 육군 위장무늬 디자이너로 잠시 근무한 뒤에는 시더래피즈 공립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파리에도 두 차례 다녀왔고, 두 번째 방문 때는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공부했다. 그 시절 그린 부드러운 인상주의풍 그림들은 훗날 그의 대외적인 이력에서 자취를 감췄다.

생계를 책임진 것은 의뢰 작업이었다. 1926년 호텔 경영자 유진 에플리를 위해 우드는 수시티의 마틴 호텔 식당을 익어가는 들판을 그린 일곱 점의 패널, Corn Room으로 장식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시더래피즈 재향군인 기념관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작업이었다. 유리는 뮌헨에서 제작됐고, 1928년 현장을 감독하던 우드는 독일과 플랑드르 르네상스 회화를 공부했다. 화분을 든 어머니를 옆모습으로 그린 초상화 Woman with Plants가 먼저 나왔고, 1930년에는 아메리칸 고딕이 뒤를 이었다.

그는 아이오와주 남부 엘던에서 박공에 뾰족한 창이 난 작은 카펜터 고딕 양식의 농가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집을 본뜬 배경 앞에 여동생 낸과 치과의사 바이런 맥키비를 세우고, 자신이 표현한 대로 “옛 가족 앨범의 틴타입 사진에 나올 법한” 옷을 입혔다. 시카고 미술관의 연례 미국 회화전에 출품된 이 패널화는 상을 받았고 미술관 소장품이 됐으며, 지금도 그곳에 걸려 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이 그림을 시골의 편협함을 풍자한 작품으로 읽었다. 대공황이 닥치자 같은 얼굴들은 개척자의 끈기를 상징하게 됐다. 우드는 풍자라는 해석을 거부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린 아이러니에 대해서는 끝내 충분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그 뒤 10년 동안 우드는 대중적 인물이 됐다. 1932년 친구 마빈 콘과 함께 스톤시티에 잠시 운영된 예술가촌을 세웠는데, 그는 이미 Stone City, Iowa에서 이 마을을 그린 바 있었다. 1934년 12월, Time은 그를 토머스 하트 벤턴, 존 스튜어트 커리와 함께 새로운 미국 미술 운동의 지도자로 묶어 소개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교수가 된 그는 엘리자베스 캐틀릿 등을 가르쳤고, 1935년에는 지역주의 선언문인 Revolt against the City를 출간했다. Dinner for Threshers 같은 그림은 농지를 둥글고 장난감처럼 보이는 지형으로 바꿔놓는다. 반면 The Midnight Ride of Paul Revere와 Parson Weems’ Fable은 미국의 건국 신화를 무대 위 장면처럼 연출한다. 이 작품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봐야 하는지를 두고 비평가들의 의견은 지금도 엇갈린다.

우드는 한 번은 풍자를 인정한 적이 있다. 미국 독립혁명 딸회 지역 지부가 전쟁 기념관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독일에서 제작했다며 이의를 제기하자, 창문은 봉헌식을 치르지 못했다. 이에 우드는 Daughters of Revolution을 그렸다. 독일에서 그려진 에마누엘 로이체의 영웅적인 그림,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을 배경으로 점잖고 나이 든 여성 세 명을 세운 작품이었다. 우드는 이 그림을 자신의 유일한 풍자화라고 했고, 훗날 “꽤 형편없는 그림이다. 소재 덕을 봤을 뿐”이라며 깎아내렸다. 한 번 이토록 날카롭게 풍자할 수 있었다면, 다른 모든 작품을 진지하게만 읽는 태도는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대신해 내린 선택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더 까다로운 논쟁은 우드라는 인물 자체를 둘러싼다. 우드는 가수 출신 세라 맥슨과 1935년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3년 만에 끝났다. 미술사학자 R. 트립 에번스는 2010년 전기에서 우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살았으며, 멜빵 작업복을 입은 농촌 소년의 모습은 가면이었다고 주장했다. 바버라 해스켈이 기획한 휘트니 미술관의 2018년 회고전도 억압과 고립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그림을 읽었다. 비평가 데버라 솔로몬은 에번스가 그 논지를 지나치게 밀어붙였다고 보고, 우드를 무성애자로 설명하는 편이 더 적절할 수 있다고 제안한 뒤 이렇게 결론 내렸다. “그는 미국 미술의 핵심적인 괴짜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될 자격이 있다.” 양측 모두 강연장을 누빈 소탈한 아이오와 출신 인물의 모습이 적어도 일부는 연기였으며, 그 때문에 그림이 한층 더 기묘해졌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대학에서는 모더니즘 성향의 미술학과장 레스터 롱먼이 우드의 교수 방식과 지역주의 모두에 반대했다. 갈등은 1940년 우드가 사임을 위협할 만큼 격렬해졌다. 그는 1941년 가을 휴직에서 복귀했지만 더는 롱먼의 감독을 받지 않았다. 그해 10월에는 회복이 어려운 병에 걸렸다. 1942년 2월 12일, 51번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아이오와시티에서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드가 세상을 떠난 뒤 모더니즘 미술사는 지역주의를 지방색에 갇힌 우회로로 취급했고, 학자들이 1970년대부터 우드의 작품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미술 시장도 뒤늦게 그 흐름을 따랐다. 2026년 1월, 아메리칸 고딕을 위한 작은 연필 밑그림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58만 4,200달러에 팔렸다. 1989년 마지막으로 거래됐을 당시 가격은 5만 달러였다.

올해는 유명해지기 전에 그린 작품들로 관심이 다시 옮겨갔다. 오랫동안 페인트와 벽지 뒤에 가려져 있던 Corn Room 패널 일곱 점은 미니애폴리스의 Midwest Art Conservation Center에서 1년 넘게 복원 작업을 거쳤다. 그리고 2026년 6월, Sioux City Art Center에서 열린 Pasture to Present 전시의 중심 작품으로 돌아왔다. 센터 큐레이터 크리스토퍼 앳킨스는 “옥수수의 노란색이 꽤 많이 살아났고, 무엇보다 하늘의 파란색이 훨씬 잘 보인다”고 말했다.

앳킨스는 아메리칸 고딕을 “세계 최초이자 가장 큰 밈”이라고도 불렀다. 우드가 가장 원치 않았지만 막을 수도 없었던 운명이다. 복원된 옥수수 그림은 다른 화가의 모습을 드러낸다. 장인의 손을 지닌 장식가이자, 아이오와가 어떤 모습인지 여전히 탐구하던 화가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 던지는 질문, 그 두 얼굴이 존중받는 것인지 조롱당하는 것인지는 우드가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넘도록 살아남았다. 어쩌면 가장 솔직한 답은 우드가 두 가지를 한꺼번에 그렸다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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