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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어트 어프, 죽은 뒤에야 미국이 영웅으로 부른 총잡이

Penelope H. Fr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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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어트 어프
와이어트 어프
Photo: Unknown author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출생1848년 3월 19일
Monmouth
사망1929년 1월 13일 (80)
직업보안관, 도박사, 술집 경영자

와이어트 어프가 로스앤젤레스의 셋집 방갈로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이름을 알던 미국인 상당수는 권투 경기의 심판으로 그를 기억했다. 신문들은 30년 동안 그를 도박꾼이자 열차 강도, 그리고 헤비급 경기에서 엉뚱한 선수의 손을 들어준 심판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그를 규정하는 묘비촌 총격전은 당시에는 매춘업소에서의 체포, 탈옥, 말 절도 혐의, 알래스카 술집에서 일군 재산, 캘리포니아 사막에서의 길고 초라한 금 찾기까지 이어진 삶의 여러 사건 가운데 그저 추악한 일화 하나였다. 관객들이 헨리 폰다, 버트 랭커스터, 커트 러셀, 케빈 코스트너의 연기로 봐온 두려움 없는 변경 지대 보안관은 어프가 살아 있을 때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전기를 쓴 작가와 모든 페이지를 꼼꼼히 지켜낸 미망인, 그리고 본보기 삼을 법의 수호자를 찾다가 생애 마지막 몇 년을 할리우드에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달라고 애썼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남자에게서 그 인물을 만들어낸 영화 산업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 인물과 허구의 인물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어프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가치가 있게 한다. 그는 용감했고,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동시에 기회주의적이고 소송을 즐겼으며, 자주 빈털터리였고 법정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는 일도 잦았다. 두 모습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전설은 그중 하나만 간직하고 나머지는 지워버렸다.

전쟁에 나가고 싶었던 농장 소년

와이어트 베리 스탭 어프(와이어트 어프)는 1848년 3월 19일 일리노이주 몬머스에서 니컬러스 포터 어프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버지니아 앤 쿡시 사이에서 태어났다. 네 자녀 중 넷째였다. 아버지는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자신의 지휘관이었던 와이어트 베리 스탭 대위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였다. 니컬러스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약 100명의 정착민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났다가 딸 마사가 병에 걸리자 발길을 멈췄고, 아이오와주 펠라 근처의 농장을 사들여 가족과 함께 10년 넘게 살았다.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와이어트의 형들인 뉴턴, 제임스, 버질은 1861년 11월 북군에 입대했다. 아버지가 지역 중대를 모집하고 훈련하느라 바빴던 터라, 열세 살 와이어트는 동생 모건, 워런과 함께 80에이커의 옥수수밭을 돌보게 됐다. 그는 여러 차례 집을 뛰쳐나와 입대하려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찾아내 집으로 데려왔다. 제임스는 1863년 미주리에서 큰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전쟁터에 나가고 싶어 했던 소년은 결국 싸우지 못했고, 몇 년 뒤 철도 제동수가 바로 그 일을 들어 그를 공격하게 된다.

1864년 니컬러스는 캘리포니아주 샌버너디노로 향하는 마차 행렬을 꾸렸다. 1865년 버질은 피니어스 배닝의 역마차 노선에서 운전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열여섯 살 동생 와이어트도 그를 도왔다. 이후 와이어트는 2년 동안 마차 운송꾼으로 일하며 윌밍턴에서 샌버너디노와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솔트레이크시티까지 이어지는 긴 마차길을 따라 화물을 날랐다. 1868년에는 와이오밍 준주에서 유니언 퍼시픽 철도에 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철도 종점에서 그는 평생 생계를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될 두 가지를 익혔다. 도박과 권투였다. 그곳에서 경기를 심판하기 시작했는데, 수십 년 뒤 한 경기가 그의 이름을 망가뜨리게 된다.

영화가 외면한 추락의 시간

가족은 동쪽으로 돌아와 미주리주 라마에 정착했고, 니컬러스는 마을 보안관이 됐다. 1869년 11월 아버지가 사임하자 와이어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같은 해 그는 지역 호텔 주인의 딸 우리라 서덜랜드와 교제하기 시작했고, 1870년 1월 10일 아버지의 주례로 두 사람은 결혼했다. 와이어트는 마을 변두리에 땅을 사 집을 지었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첫아이를 임신한 우리라가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영화판에서 빠진 이야기다. 1871년 3월 바턴 카운티는 와이어트가 지역 학교를 위해 거둔 면허 수수료를 넘기지 않았다며 그를 고소했다. 몇 주 뒤에는 인디언 준주에서 다른 두 남자와 함께 말 두 필을 훔친 혐의로 기소됐다. 한 주민은 법원 판결문의 금액을 고쳐 차액을 챙겼다고도 그를 비난했다. 미 연방보안관보에게 체포된 어프는 심리를 기다리지 않았다. 감옥 지붕을 통해 탈출한 뒤 일리노이주 피오리아로 향했다.

피오리아의 기록은 거침없다. 1872년 2월 경찰이 매춘업소를 급습해 와이어트와 모건 어프, 여성 몇 명을 체포했고, 형제는 불법 매춘업소 운영 혐의로 기소됐다. 5월에도 같은 혐의로 다시 체포됐으며, 9월에는 부유식 매춘업소로 개조한 용골선 ‘비어즈타운 건보트’에 타고 있다가 와이어트가 붙잡혔다. 그와 함께 체포된 샐리 헤켈이라는 젊은 매춘부는 자신을 그의 아내라고 밝혔다. 지역 신문은 그를 “피오리아의 건달”이라고 깎아내렸다. 몇 년 뒤 어프는 전기 작가에게 당시 초원에서 들소 사냥을 했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으며, 역사가들은 들소 사냥 이야기가 공백을 메우려고 지어낸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위치타와 닷지시티, 배지를 달다

1874년 어프와 샐리는 캔자스주 위치타로 옮겼다. 소몰이로 번성한 이 도시에서는 그의 형 제임스와 제임스의 아내가 매춘업소를 운영했다. 역사가 게리 L. 로버츠는 와이어트가 포주라기보다 업소의 해결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위치타는 텍사스에서 소를 몰고 오는 길의 종착지였고, 술에 취해 총을 든 카우보이가 계절마다 몰려들어 이들을 다룰 사람이 끊임없이 필요했다. 1875년 4월 어프는 마이크 미거 밑에서 월급 100달러를 받는 시 보안관실에 들어갔고, 부업으로 파로 도박판을 운영했다.

지역 언론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유능한 경찰관이었다. 위치타 비컨은 그가 다리 근처에서 약 500달러를 지닌 채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낯선 사람을 발견해, 술이 깰 때까지 유치장에 넣었다가 돈을 한 푼도 건드리지 않고 돌려줬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경찰의 청렴성은 한 번도 심각하게 의심받은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위치타에서의 경력은 1876년 4월 주먹다짐으로 끝났다. 전직 보안관이 어프가 형제들을 고용하는 데 직위를 이용했다고 비난하자, 어프는 그를 때렸고 30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시의회는 그를 다시 고용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캔자스에서 가장 분주한 소몰이 도시로 떠오르던 닷지시티로 제임스를 따라가 부보안관이 됐다. 그곳에서 전직 매춘부 매티 블레이록을 만났고, 그녀는 이후 5년 동안 사실혼 관계의 아내로 지냈다. 1876년 겨울 데드우드 골드러시에 뛰어들었지만, 이미 모든 광구가 주인을 찾은 뒤였다. 대신 야영지에 땔감을 실어 나르며 약 5,000달러를 벌었다. 닷지시티로 돌아온 그는 경찰 업무를 다시 맡았다. 기록에 담긴 모든 일화가 영웅적인 것은 아니다. 지역 신문은 술집에서 리볼버가 홀스터에서 빠져나와 그의 코트를 뚫고 한 발 발사됐다고 전했다. 1878년에는 말다툼 중 매춘부의 뺨을 때려 1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1877년 말 그는 철도 공사 현장을 턴 무법자 데이브 러더보를 쫓기 위해 미 연방보안관보 임시 위촉을 받아 텍사스까지 수백 마일을 추적했다. 포트 그리핀에서 수년간 알고 지낸 술집 주인은 러더보와 카드놀이를 했던 도박꾼에게 물어보라고 권했다. 그 도박꾼은 조지아 출신 치과의사 존 헨리 홀리데이였다. 닥 홀리데이는 러더보가 캔자스로 되돌아갔다고 알려줬다. 몇 달 뒤 닷지시티의 롱 브랜치 술집에서 카우보이 무리가 총을 겨눈 채 어프를 구석으로 몰아넣었을 때, 뒤편에서 카드놀이를 하던 홀리데이는 우두머리의 머리에 권총을 겨눠 그들이 무장해제하도록 했다. 어프는 홀리데이가 자기 목숨을 구했다고 여겼다. 두 사람의 우정은 몇 년 뒤 격렬한 다툼을 겪고도 이어졌으며, 1887년 홀리데이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같은 여름, 어프와 배트 매스터슨은 마을에서 총을 난사한 카우보이 무리를 향해 총을 쐈다. 그중 총알 세 발이 코미크 극장에 박혔고, 코미디언 에디 포이는 무대로 몸을 던져 피했다. 조지 호이트라는 기수 한 명은 부상을 입고 쓰러져 몇 주 뒤 숨졌다. 훗날 어프는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그에게 총을 겨눴다고 묘사했지만, 영화 같은 이 장면은 사건이 벌어진 시점이나 신문 보도와 모두 맞지 않는다.

툼스톤, 은광, 그리고 얻지 못한 보안관 자리

1879년 무렵 닷지시티는 차츰 안정을 찾고 있었다. 당시 프레스콧에서 법 집행관으로 일하던 버질은 형제들에게 애리조나 준주의 은광 도시 툼스톤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와이어트는 9월 닷지시티 경찰을 그만두고 매티, 제임스, 제임스의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섰다. 이들은 1879년 12월 1일 툼스톤에 도착했다. 버질은 막 그 지역의 미 연방보안관보로 임명된 참이었다. 와이어트는 역마차로 개조할 생각으로 마차를 가져왔지만, 이미 역마차 노선 두 개가 운영 중인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나중에 툼스톤에서 번 돈 대부분이 전문 도박꾼으로 일해 얻은 수입이었다고 말했다. 형제들은 광구를 신청하고 물 사용권을 사들인 뒤, 광산 붐이 결실을 맺기를 기다렸다.

1880년 웰스파고는 역마차의 금고를 지키는 산탄총 경호원으로 그를 고용했다. 이어 피마 카운티 동부의 부보안관에 임명됐다. 보안관은 세금도 징수하고 그 일부를 수수료로 챙겼으므로, 이 자리는 큰돈을 벌 기회처럼 보였다. 1880년 10월 28일 밤, 툼스톤의 시 보안관 프레드 화이트는 앨런 스트리트에서 술에 취해 총을 쏘던 컬리 빌 브로시어스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다. 브로시어스의 권총이 발사돼 화이트는 치명상을 입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굴뚝 옆에 서 있던 어프는 브로시어스를 권총으로 내리쳐 쓰러뜨린 뒤 체포했다. 현장에 있던 웰스파고 직원은 어프의 목소리가 “평소처럼 차분하고 조용했다”고 적었다. 와이어트와 버질은 브로시어스를 투손까지 호송했는데, 린치를 당할 뻔한 그를 구해준 셈일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총격이 사고였다고 증언했다. 브로시어스는 풀려났지만, 자신을 때린 어프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보안관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1881년 코치스 카운티가 피마 카운티에서 분리되자, 어프와 민주당원 조니 비핸이 신설된 보안관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훗날 어프의 증언에 따르면 비핸은 자신이 물러나면 부보안관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비핸은 보안관 자리를 차지한 뒤 부보안관직은 다른 사람에게 줬고, 나중에 그 약속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했다. 어프는 배지를 얻지 못한 채 오리엔털 술집에서 파로 도박판 수익의 4분의 1을 받으며 일했다. 그는 배트 매스터슨과 루크 쇼트를 불러 딜러를 맡겼다. 한편 비핸은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젊은 여성 조세핀 세라 마커스와 함께 툼스톤에 도착했다. 1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비핸을 떠났다. 어프는 그녀를 눈여겨봤다.

프리몬트 스트리트에서 벌어진 30초

1881년 내내 어프 형제와, 현지에서 카우보이즈라 불리던 밀수꾼 및 역마차 강도 무리 사이의 긴장은 점점 심해졌다. 군용 노새 절도, 운전사와 승객 한 명이 목숨을 잃은 역마차 강도 사건, 강도들을 배신하는 대가로 아이크 클랜턴과 프랭크 맥로리에게 웰스파고의 현상금을 주겠다고 어프가 제안한 비밀 거래, 그리고 형제들을 향한 거듭된 살해 위협이 있었다. 당시 툼스톤 시 보안관이었던 버질은 마을에서 총기를 휴대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례를 집행하고 있었다.

1881년 10월 26일 오후, 버질은 무장한 카우보이즈가 O.K. 목장 근처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와이어트와 닥 홀리데이를 부보안관으로 임명하고 모건과 함께 프리몬트 스트리트로 향했다. 목장 뒤편 출입구 옆, 몇 걸음 떨어진 좁은 공터에서 남자 다섯 명을 발견했다. 뒤이어 벌어진 일은 약 30초 만에 끝났다. 아이크 클랜턴과 빌리 클레이본은 달아났다. 톰과 프랭크 맥로리, 그리고 열아홉 살 빌리 클랜턴은 목숨을 잃었다. 버질은 종아리에, 모건은 등에 총을 맞았고 홀리데이는 스치는 총상을 입었다. 와이어트는 아무 상처 없이 걸어 나왔다.

이 싸움은 영화가 그려낸 것처럼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아이크 클랜턴은 살인 혐의로 고발했고, 웰스 스파이서 판사는 증인 약 30명이 출석한 가운데 한 달간 예비 심리를 진행했다. 보안관 비핸은 카우보이즈가 손을 들고 코트를 열어 무장하지 않았음을 보였는데도 어프 일행이 총을 쐈다고 증언했다. 와이어트는 카우보이즈가 총을 꺼내려 했을 때에야 자신들이 발포했다고 주장하는 장문의 서면 진술을 읽었다. 11월 30일 스파이서 판사는 사건을 정식 재판에 넘길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며 어프 형제는 법 집행관으로서 행동했다고 판결했다. 형제들은 풀려났지만, 툼스톤 주민 절반은 이제 그들을 살인자로 여겼다.

복수의 질주

복수는 빠르게 찾아왔다. 12월 28일 버질은 앨런 스트리트에서 매복 공격을 당해 산탄총에 왼팔이 산산조각 났다. 총격이 시작된 건물에서 아이크 클랜턴의 모자가 발견됐지만, 그는 자신이 다른 곳에 있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을 내세웠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와이어트는 자신이 직접 부보안관을 고를 수 있는 권한과 함께 미 연방보안관보로 임명됐다. 부하들의 급료를 대려고 집을 담보로 잡혔고, 비판이 커지자 사직하려 했다. 그러던 1882년 3월 18일, 모건이 당구장에서 게임을 하던 중 유리문 너머로 총을 맞았다. 그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숨졌다.

와이어트는 법원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다음 날 그는 형 워런과 홀리데이, 그리고 하루 5달러를 받고 고용된 총잡이 몇 명을 포함해 보안대를 꾸렸다. 투손역에서 버질과 그의 아내를 배웅하던 중, 모건 살해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인 프랭크 스틸웰을 철도 차량기지에서 발견했다. 다음 날 아침 스틸웰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후 2주 동안 보안대는 목재 야적장에서 플로렌티노 크루스를 사살했고, 휘트스톤 산맥의 아이언 스프링스에서는 컬리 빌 브로시어스와 그의 부하들을 우연히 마주쳤다. 브로시어스는 와이어트에게 산탄총을 쐈지만 빗나갔다. 와이어트는 브로시어스의 산탄총으로 그를 쏴 죽였다. 한때 린치 폭도에게서 구해준 바로 그 남자였다. 어프는 훗날 총알이 코트를 관통했지만 몸에는 닿지 않아 코트가 갈가리 찢겼다고 묘사했다.

검시관들은 보안대가 네 명을 죽였다고 기록했다. 추격은 어프와 부하들이 수배자가 되어 애리조나를 떠나면서 끝났다. 투손에서 발부된 살인 혐의 체포영장이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어프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이 일을 정의의 실현이라고 부르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연방 배지를 앞세운 연쇄 살인이라고 부른다. 두 표현 모두 증거에 들어맞기에 논쟁은 끝난 적이 없다.

조세핀, 그리고 다시 길 위에서 시작한 삶

어프는 콜로라도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갔고, 그곳에서 조세핀 마커스와 다시 만났다. 그녀는 자신을 조세핀 어프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46년 동안 함께 살았다. 다만 훗날 그녀가 백만장자 경마 선수 럭키 볼드윈의 요트에서 결혼했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 결혼 기록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와이어트를 기다렸던 매티 블레이록은 홀로 남겨졌다. 그녀는 애리조나로 돌아가 매춘을 다시 했고, 1888년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세핀은 남편에 관한 책 어디에도 매티의 이름이 나오지 않도록 평생 애썼다.

두 사람은 20년 동안 금광 붐을 좇아 옮겨 다녔다. 1883년 어프는 매스터슨과 다른 옛 친구들과 함께 닷지시티로 가, 술집을 둘러싼 정치 싸움에서 루크 쇼트의 편을 들었다. 마을 측이 물러나면서 이른바 ‘닷지시티 전쟁’은 총성 한 발 없이 끝났다. 1884년에는 아이다호주 이글시티로 가 커다란 천막 안에 술집을 열었다. 1887년부터는 부동산 붐이 한창이던 샌디에이고에서 살았다. 어프는 술집과 도박장을 여럿 소유했고, 호황기에는 하룻밤에 최대 1,000달러를 벌었다. 말을 사서 경주에 출전시키고 경주 심판을 맡았으며, 멕시코 국경 양쪽에서 권투 경기 심판도 했다. 샌디에이고의 호황이 꺼지자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엉뚱한 이유로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경기

1896년 12월 2일, 어프는 샌프란시스코 메카닉스 파빌리언에서 열린 밥 피츠시먼스와 톰 샤키의 헤비급 경기에 막판에 심판으로 투입됐다. 경기 전 경찰 간부가 링 위에서 그의 큰 리볼버를 압수했고, 그날 밤 어프는 은닉 무기 소지 혐의로 체포됐다. 피츠시먼스가 경기를 압도했다. 8라운드에서 샤키가 사타구니를 움켜쥔 채 쓰러지자, 어프는 아무도 본 것 같지 않은 로블로를 선언하고 샤키의 승리를 판정했다. 약 1만 5,000명의 관중이 들고일어났다.

피츠시먼스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2주 동안 전국의 신문은 승부 조작과 샤키에게 걸린 판돈, 그리고 과거 역마차 강도였던 어프 형제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다. 삽화가들은 동서부를 막론하고 그를 희화화했다. 결국 판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권투 시합은 불법이며 법원이 승자를 정해줄 수 없다고 판결했다. 몇 년 뒤 한 의사는 샤키가 반칙을 당한 것처럼 보이도록 돈을 받았다고 털어놨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날 밤까지 어프는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만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날 이후 미국 전역이 그를 알게 됐고, 사람들이 알게 된 모습은 부정한 심판이었다.

놈, 광부들을 캐다

1897년 어프 부부는 클론다이크 골드러시를 좇아 북쪽으로 향했다. 와이어트는 알래스카주 브랜겔에서 약 열흘 동안 보안관으로 일했고, 두 사람은 유콘강 램퍼트의 셋집 오두막에서 겨울을 보냈다. 1899년 훗날 권투 흥행사가 된 친구 텍스 리카드가 그를 설득해 놈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어프는 찰스 혹시라는 동업자와 함께 덱스터 술집을 지었다. 이곳은 마을 최초의 2층 목조 건물이자 가장 호화로운 술집으로, 위층에는 회원 전용 별실이 있었다. 작가 잭 런던과 훗날 소설가가 된 렉스 비치, 극작가 윌슨 미즈너가 이곳을 거쳐 갔다. 어프는 자신의 사업 방식을 세 단어로 설명했다. 광부들을 캐는 것.

1901년 말 알래스카를 떠날 때 두 사람은 약 8만 달러, 작은 재산이라 할 만한 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조세핀은 도박에 많은 돈을 썼고, 이후 10년 동안 이들은 네바다주 토노파에서 은을 찾아다녔다. 어프는 그곳에 술집을 하나 더 열었다. 이어 모하비 사막에서 광맥을 탐사했다. 1906년 캘리포니아주 비달 근처 휘플 산맥에서 금과 구리 광상을 발견하고 광구 수십 곳을 신청했다. 두 사람이 비달에서 사들인 작은 오두막은 평생 소유한 유일한 집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겨울에는 사막의 해피 데이즈 광산에서 일하고, 여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저렴한 셋집에서 지냈다.

오래된 버릇은 그를 따라다녔다. 1910년, 예순두 살의 어프는 로스앤젤레스 경찰에 비공식적으로 고용돼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일을 맡았다. 같은 해 시얼스호 광산 분쟁에서 한쪽의 무장 경비를 이끌며 연방 관재인의 발치에 소총을 쏘았다. 미 연방보안관들이 그와 다른 스물댓 명을 체포했다. 1911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다시 체포돼, 조작된 파로 도박판으로 부동산 중개인을 속이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실제로 돈이 오간 적이 없었기에 혐의는 부랑죄로 낮아졌다.

할리우드, 끝내 영화로 만들지 못한 이야기

당시 로스앤젤레스는 서부극 영화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고, 어프는 영화 촬영장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출연한 The Half-Breed 촬영 중 감독 앨런 드완을 찾아갔다. 라울 월시 감독, 잭 런던과 함께 식사하기도 했고, 당시 세계에서 출연료가 가장 높았던 배우 찰리 채플린도 식탁에 들러 그를 만났다. 그는 무성영화 시대의 가장 유명한 카우보이 스타 윌리엄 S. 하트, 톰 믹스와 가까운 친구가 됐다. 당시 소품 담당으로 일했던 존 포드는 훗날 어프에게 의자와 커피를 내주고 총격전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 기억을 토대로 My Darling Clementine의 총격 장면을 연출했다는 것이다. 존 웨인은 배우 휴 오브라이언에게, 자신이 연기한 보안관의 걸음걸이와 태도 일부는 촬영장에서 만난 노인에게서 가져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어프가 바라던 영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스크린에 등장한 유일한 작품은 1923년 하트의 Wild Bill Hickok으로, 버트 린들리가 단역으로 그를 연기했다. 어프는 하트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며 영화가 “나에 관한 거짓말만 들어온 대중 앞에서 내 명예를 바로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썼다. 하트는 먼저 작가를 찾아보라고 했다. 어프의 친구이자 광산 기술자였던 존 플러드는 일요일 오후마다 어프 부부의 부엌에서 공인 전기를 집필했다. 조세핀은 중간중간 끼어들어 모든 내용을 점잖게 다듬으라고 요구했다. 출판사들은 원고가 딱딱하고 읽기 어렵다며 거절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어프

와이어트 어프는 1929년 1월 13일, 여든 살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 웨스트 17번가의 작은 셋집 방갈로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프 형제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이자 O.K. 목장 총격전의 마지막 생존 참여자였다. 자녀는 없었다. 윌셔 대로의 회중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윌리엄 S. 하트와 톰 믹스가 관을 멨다. 툼스톤 시장을 지냈고 툼스톤 에피태프의 편집자였던 존 클럼, 놈에서 알게 된 윌슨 미즈너도 함께했다. 신문은 믹스가 눈물을 흘렸다고 보도했다. 조세핀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조세핀은 남편의 시신을 화장한 뒤, 샌프란시스코 인근 콜마의 유대인 묘지인 힐스 오브 이터니티에 있는 가족 묘역에 유골을 조용히 묻었다. 1944년 그녀도 세상을 떠나 그의 곁에 묻혔다. 묘지 위치는 여러 해 동안 가족의 비밀로 남았다. 1957년 도굴꾼들이 유골함을 찾으려고 묘역을 파헤쳤지만 찾지 못했고, 대신 묘비를 훔쳐 갔다. 묘비는 나중에 벼룩시장에서 발견됐다. 지금은 이 묘지가 묘역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곳이다.

전기 작가가 보안관을 만들어낸 과정

어프의 명예 회복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 시작됐다. 말년에 그를 인터뷰했던 기자 스튜어트 N. 레이크는 1931년 Wyatt Earp: Frontier Marshal을 출간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과장이 크게 보태진 작품으로, 어프를 흠잡을 데 없는 보안관으로 그렸다. 피오리아에서의 일, 위치타의 매춘업소, 말 절도 혐의, 매티 블레이록, 샤키와의 경기에 관해서는 대부분 침묵했다. 조세핀은 자신의 과거와 매티의 존재를 책에서 빼도록 레이크를 압박하고 법적 조치까지 경고했다. 할리우드에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1934년 첫 영화판은 주인공의 이름을 바꾸도록 했고, 20세기 폭스가 랜돌프 스콧 주연으로 1939년 Frontier Marshal을 리메이크하자 소송을 제기해 5,000달러를 받고 합의했다.

그 뒤 어프라는 인물은 영화의 것이 됐다. 1946년 헨리 폰다가 출연한 존 포드의 My Darling Clementine은 어프를 조용하고 정의로운 보안관으로 만들었다. The Life and Legend of Wyatt Earp은 휴 오브라이언이 주연을 맡고 레이크가 일부 대본을 쓴 가운데 1955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 TV에서 방영됐다. 1957년 버트 랭커스터가 어프, 커크 더글러스가 홀리데이를 연기한 Gunfight at the O.K. Corral은 영웅적인 법 집행관의 이미지를 굳혔다. 툼스톤에서 무법자를 뜻했던 ‘카우보이’라는 말도 어느새 선량한 주인공의 대명사로 바꿔놓았다. 1950년대 말이면 실제 어프는 이미 그를 연기한 배우들 뒤로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후 재평가가 이어졌다. 1950년대 연구자들이 매티 블레이록의 존재를 밝혀내면서 성자 같은 보안관의 이미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임스 가너는 1967년 Hour of the Gun에서 복수에 사로잡힌 한층 어두운 어프를 연기했다. 1990년대에는 몇 달 간격으로 경쟁작인 대작 두 편이 나왔다. 커트 러셀이 어프를 맡고 발 킬머가 명대사를 남긴 닥 홀리데이로 출연한 Tombstone, 그리고 일찍 세상을 떠난 젊은 아내와 말 절도 체포, 어두운 시절까지 담으려 한 로렌스 캐스던의 3시간짜리 Wyatt Earp이었다. 넷플릭스는 2024년 에드 해리스가 내레이션을 맡고 팀 펠링햄이 어프를 연기한 6부작 다큐드라마 Wyatt Earp and the Cowboy War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작품은 아이크 클랜턴과의 불화에 초점을 맞췄다.

기록이 실제로 뒷받침하는 것

와이어트 어프의 진짜 모습은 영웅이나 악당 어느 쪽보다도 단정하게 정리하기 어렵다. 당시 신문들은 총격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모습과 위치타 경찰관으로서의 정직함을 칭찬했다. 같은 신문들은 포주 혐의로 체포된 일과 탈옥, 여성을 때려 벌금을 문 일도 기록했다. O.K. 목장 심리에서는 무죄로 풀려났지만, 이어진 복수의 질주로 도망자 신세가 됐다. 어떤 총격전에서도 부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설을 더 키웠다. 성인기의 대부분 동안 그는 법 집행관이 아니라 도박꾼이자 술집 주인, 말 거래상, 탐광자였다. 배지를 얻을 수 있고 쓸모가 있을 때마다 이를 이용했을 뿐이다.

전설을 만드는 데 그 자신이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들소 사냥 이야기와 호이트를 쏜 일화에서 드러나듯 그는 사실을 부풀렸고, 노년에는 자신의 입장을 전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거짓말만 들어왔다”고 윌리엄 S. 하트에게 편지를 쓴 사람은 성자가 되고 싶어 한 것이 아니었다. 성자 이미지는 레이크의 타자기와 조세핀의 편집, 그리고 흠 없는 영웅을 원한 영화사들이 만들어냈다. 말년에 어프 부부를 알고 지낸 가족 친구 그레이스 스폴리도라는 1990년 인터뷰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조세핀은 남편을 교회에 다니는 성자처럼 보이게 하고 싶어 했지만, 와이어트는 전혀 그런 모습을 원하지 않았다고.

그의 흔적은 예상치 못한 곳에도 남아 있다. 어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광구 근처의 사막 우체국은 캘리포니아주 어프로 이름이 바뀌었다. 극지 탐험가 링컨 엘스워스는 남극 탐험선에 Wyatt Earp라는 이름을 붙였다. 1926년 어프가 존 플러드에게 설명을 덧붙인 총격전 스케치는 2010년 경매에서 38만 달러에 팔렸고, 소유 경위에 논란이 있는 그의 것으로 알려진 리볼버는 2014년 22만 5,000달러에 낙찰됐다. 툼스톤에서는 지금도 매년 메모리얼 데이 주말에 와이어트 어프 데이를 열며, 주민들은 1880년대 복장을 하고 프레드 화이트가 총에 맞았던 앨런 스트리트를 걷는다. 어프가 평화의 수호자였는지 무장한 기회주의자였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그를 알던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어지고 있다. 남아 있는 증거만으로는 그 논쟁을 끝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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